공희준 편집위원
살면서 아주 이따금씩, 정말로 드물게 경험하는 사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목돈이 들어오는 일이다. 나머지 하나는 출판되기 전에 원고 상태로 있는 남의 글을 미리 읽어보는 일이다.
목돈이 들어오는 일은 전적으로 나의 능력의 산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출판되기 전에 원고 상태로 있는 남의 글을 읽어보는 일은 순전히 타자 또는 타인들의 호의가 베풀어져야만 한다.
역시나 사람은 오래 살고 볼 노릇이다. 홍석현 이사장이 새로 펴낸 대담집인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를 나 같은 힘없고 가난한 일개 서민 가장이 출판되기 전의 원고 상태로 미리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니 말이다.
홍석현이 차마 못한 말은
홍석현 현 ‘재단법인 한반도 평화만들기’ 이사장 겸 전 중앙일보 회장(이하 ‘홍석현’으로 약칭)은 한국사회의 대표적 하이 클래스(High Class)이다. 한마디로, 기득권층의 핵심 구성원이라 하겠다.
내로라하는 기득권층의 일원이 지은 원고 상태의 따끈따끈한 초고가 필자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내가 짐작하기로는 홍석현에게 두 가지 큰 꿈이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첫 번째 꿈은 그의 책에 공식적으로 표명된 한반도 평화의 정착이다. 홍석현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실현하려면 북한의 비핵화와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미국에게는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확실한 체제보장을, 한국에게는 북한경제의 번영을 위한 과감한 대북경협을 각각 주문하고 있다.
두 번째 꿈은 책 군데군데 암호처럼 숨어있다.
“남과 북은 이미 실질적으로 두 나라입니다. 또 연방제를 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닙니다. 지금 남한의 경제 규모는 북한의 40배가 넘어요. 현실이 이럴진대 같은 국가의 연방 안에서 두 체제의 공존이 가능할까요? 못해도 5 대 1은 되어야 논의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경제력 격차가 이렇게 큰데 하나의 연방제국가로 가자는 주장을 누가 따르겠어요?”
-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도서출판 메디치)」 104~105쪽에서 인용
어떤 연유에서인지 홍석현 본인이 차마 대놓고 발설하지 못한 그의 두 번째 꿈은 남남갈등의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한 종식이다. 단적으로 위의 인용문에서 남한을 강남으로, 북한을 강북으로 치환해놓으면 21세기 대한민국이 당면한 깨어있는 악몽일 지독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정면으로 겨냥한 이른바 팩트 폭격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리는 이유에서이다. 남남갈등의 극복과정에 요구되는 각계각층의 의견수렴 작업에서 아마도 내가 각계각층의 대표자로 우정출연한 듯싶다.
어둠이 있기에 아침이 오고 가뭄 끝에야 단비가 내리듯이, 영웅담 「일리아드」가 선행됐기에 그 후일담이라고 일컬어질 모험담 「오디세이」도 가능했다. 이는 한반도 차원의 평화를 향한 대장정이 성공 내지 성사되려면, 휴전선 이남에 자리한 남한 차원의 일리아드에 마침표가 찍혀야 한다는 뜻이다.
홍석현이 우려 반, 개탄 반의 심정으로 소개한 남북한 간의 심각한 국력 차이와 경제력의 불균등은 사실은 한국사회 내부에서의 정치권력의 집중과 부의 불평등을 한반도 전체로 확대해놓은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의 평화 없이는 남한사회 안에서 사생결단으로 갈등하는 계층과 세력 사이의 화해가 이뤄질 수 없는 것처럼, 남남갈등의 극복 없이는 남북한과 여러 외세가 뒤얽혀 빚어낸 한반도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홍석현은 언론인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경제 전문가와 고위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의 사돈집안은 저 유명한 삼성재벌이다. 사분오열된 발칸반도도 모자라 이제는 모자이크처럼 분열된 레바논마저 급기야 닮아갈 기세까지 공공연히 드러내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파편화 현상을 홍석현이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리라.
그럼에도 홍석현은 총성 없는 내전을 치르는 중인 남한의 구체적 현실을 애써 ‘패싱’하고 추상적인 한반도 정세로의 워프를 감행했다.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머가 「일리아드」를 생략한 채 곧장 「오디세이」부터 노래한 격이다. 관객들 사이에서 당황과 동요의 기색이 역력히 감도는 사태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인 이유다.
대북송금 특검의 비극과 홍준표의 희극
칼 마르크스(1818~1883)는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의 서두에서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역사가 하릴없이 고질적으로 되풀이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역사가 도약을 허락하지 않는 데 그 까닭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싶다. 도약을 불허하는 역사를 상대로 무모하게 비약을 도모하는 인간의 오만과 어리석음이 역사의 무의미한 재방송을 자초해왔다.
대북송금 특검은 남남갈등이 극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한 남북화해가 부른 비극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선의와 진정성을 갖고서 남북관계 발전에 적극적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필자 또한 기꺼이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련다. 문제는 현재의 집권세력이 시한폭탄처럼 잠복한 남남갈등의 위험성에는 크게 개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금년 추석명절에 남한에 선물한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품으로 정부가 제주산 감귤을 공군 수송기편으로 북측에 보냈다. 자유한국당의 대선후보까지 지낸 홍준표 전 경남지사는 정부당국이 감귤상자에 귤과 함께 달러뭉치도 담아 북으로 보내줬을 것이라는 식의 괴담을 퍼뜨려 남남갈등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있다. 비극적인 대북특검의 역사가 희극으로 재연되는 모양새이다.
어깨 위에 머리가 달려 있는 사람이라면 홍준표 전 지사의 얘기가 터무니없는 억측이고 악의적인 망언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허나 홍준표는 이 억측과 망발 하나만으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성공적으로 재진입했다. 홍준표는 식상하고 썰렁한 아재 개그를 치면서 정통 액션 영화의 비중 있는 악역을 단숨에 날름 꿰찬 셈이다.
그러나 본질은 홍준표의 무책임한 정치공세에 있지 않다. 홍준표는 남한이 아직도 피 튀기는 「일리아드」의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영악하게 눈치 채고 있다. 그는 남남갈등의 고의적 조장이 남북화해를 방해하는 최고의 효과적 수단임을 날카롭게 꿰뚫어봤다.
남남갈등은 홍준표 같은 시대착오적 반북 냉전주의자들이 치밀한 기획 아래 창작해낸 허구의 상상물이 아니다. 확고한 물질적 토대를 반영하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현실이다. 잔인한 역사의 운명은 남북의 경제력 격차가 40배에 달하는 양극화만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똑같은 서울시내임에도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신입생 숫자가 강북(중랑구)과 강남(강남구)이 무려 40배의 차이가 나게끔 이끌었다.
북한과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가 남한 내에 거의 고스란히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한국은 정상적인 민주공화국으로 자리하기가 어렵다. 남한에 정상적인 민주공화국이 없는 상태에서 탄생할 북한과의 연방 혹은 국가연합이 과연 무슨 의의가 있겠으며, 어떻게 지속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홍석현이 야심차게 착수한 「한반도 오디세이」는 여전히 「일리아드」 단계에서 고통 받는 한국의 평범한 서민대중에게는 이와 같은 사연과 한계들로 말미암아 공허한 관념론이란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사실 필자는 홍석현의 초고를 받아들었을 때 이러한 기조와 내용의 추궁과 반론을 거칠게 인정사정없이 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럴 기회까지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홍석현이 「한반도 오디세이」의 출발을 잠시 보류하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 여행은 홍석현 다음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후배세대의 몫으로 남겨둬야만 할지도 모른다.
필자는 홍석현이 ‘지금, 여기에서’ 손대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하고 중차대한 숙제는 헌신적 영웅과 거룩한 신화 대신에 탐욕스러운 좌우의 기득권 집단이 준동하고 관수동 고시원 화재 참사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쓰라린 비극만이 난무하는 남한사회의 이 지긋지긋한 「일리아드」를 너무 늦게 전에 끝장내는 데 있다고 믿는다.
남한사회의 평화로운 갈등을 일거에 지혜롭게 잠재울 트로이의 목마 없이는 철통같은 한미공조도, 빈틈없는 압박과 제재도, 견결한 우리민족끼리도 한반도 전체의 궁극적 평화를 달성하는 데에는 한참 역부족일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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