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한국사는 ‘민란의 시대’로 규정된다. 북한 학계에서 ‘서북농민전쟁’으로 높이 자리매김해놓은 홍경래의 난으로부터 시작해, 진주민란과 갑오농민전쟁(종전 동학혁명)에서 절정을 이루는 항쟁과 봉기의 역사는 웬만한 국민들이라면 학창 시절에 국사책에서 이미 배웠던 내용인 까닭에 선명한 형태로건, 또는 어렴풋한 기억으로건 머릿속 한 귀퉁이에 아직까지도 남아있을 듯싶다.
문재인 시대는 제2의 민란시대인가
민란의 시대를 초래한 원인은 지배계급이 인민을 상대로 자행한 혹독한 가렴주구였다.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수탈과 착취의 측면에서는 농민군들이 화승총 쏘아대며 관아의 문을 깨뜨리던 19세기 조선왕조나, 수많은 서민층 청년들이 ‘헬조선’의 절망감을 인터넷 공간에서 쏟아내는 21세기 초엽의 소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나 별반 나아진 부분도, 달라진 구석도 없다.
재벌과 건물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기득권 계급의 뿌리 깊은 탐욕과 횡포는 이제는 길 가는 유치원생조차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재벌이나 건물주와 견주어 단지 수금의 기술과 액수에서만 조금 밀릴 뿐, 먹성과 물욕에서는 결코 그에 못잖을 양대 신흥 기득권층마저 슬금슬금 등장해 서민대중의 등골을 빼먹고 있다. 국민들로부터 악착같이 뜯어낸 세금에 기대어 안정된 월급은 물론이고 은퇴 후의 풍족한 연금까지 알뜰하게 챙겨가는 공무원과 교사들과 직업군인들,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와 땀과 눈물을 자양분 삼아 고액 연봉자의 대열에 새롭게 진입하는 데 성공한 민주노총 산하의 거대 정규직 노조원들이 삼정의 문란에 편승해 발호했던 조선 말기의 악덕 아전들 뺨치는 바로 이 양대 신흥 기득권층이다.
화성에서 온 유명함, 금성에서 온 유능함
상황이 이쯤 되면 우리 사회의 진짜로 힘들고 어려운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야만 정상이리라. 하지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민란 아닌 민란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어 필자처럼 힘없고 가난한 평범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전원책 전 자유한국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원과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이 뜬금없는 봉기의 주동자들이다.
민란은 정치경제의 구조적인 불의와 모순의 산물이다. 이는 보편적 현상이다. 전원책의 난과 이언주의 난은 반면에 아주 특수한 현상이다. 정치 컨설턴트인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가 언급한 “유명한 것이 유능한 것으로 통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과잉 전성시대의 독특한 현실이 이언주의 난을 부추기고, 전원책의 난을 촉발시킨 이유에서다.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고 해서 아무나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유명해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자신이 존재해야 한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이러한 사회적 자산을 ‘신분재’로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신분재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좋은 학교 나와 좋은 직업 꿰찬 상태다. 서울대학교를 다닌 다음 사법고시에 합격해 대기업(S-Oil)의 법률총괄 임원을 역임한 이언주 의원과, 유명 사립대학교의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전원책 변호사 모두 유명해지는 데 요구되는 신분재를 이미 확실하게 갖추고 있는 셈이다. 덧붙이자면 전원책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 직계 후배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을 후하게 평가해주는 편이다, 미모의 대기업 고문 변호사 이언주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금배지를 단 건 전적으로 자신의 유능함 덕분이었다. 법조인 전원책이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의 인기 출연자로 각광을 받은 끝에 마침내 비록 잠깐일지언정 어느 종편채널(TV 조선) 9시 정규 종합뉴스의 메인 앵커로 발탁된 것은 진선진미하게 그의 유능함 덕택이었다.
딱 여기까지였다. 유명함으로 성취해낼 수 있는 목표의 한계치이자, 유명함으로 그럭저럭 버텨낼 수가 있는 사회적 맷집과 내구력의 한도가. 그 이상의 목적지에 도달하고, 사회적 맷집과 내구력을 키우려면 이제부터는 유명함이 아닌 유능함으로 본인의 삶을 추동․전진시켜야만 한다.
유능해지는 데는 유명해지는 일에서보다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민주당 시절과 비교해 이언주 의원이 더 유능해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단적으로,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전부 이언주의 있고 없고는 당의 성패와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과시할 수 있는 최고의 유능함은 당을 집권당으로 끌어올리는 거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언주 의원의 탈당과 무관하게 정권을 잡았고, 바른미래당의 전신인 국민의당은 이언주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참패했다. 도대체 이언주의 유능함은 언제쯤 발휘될 수 있을까?
이언주의 개인전과 전원책의 단체전
이언주 의원이 유명함과 유능함은 “거의 상관이 없음”을 개인전 차원에서 증명했다면, 전원책 변호사의 경우는 유명함과 유능함이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단체전 층위에서 유감없이 드러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전원책 변호사를 조강특임 위원으로 위촉한 결정은 전원책이라는 이름값에 담긴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김병준 위원장 본인부터가 유명한 게 유능한 것이라는 치명적 착각에 깊게 빠져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자유한국당이 참여정부 인사인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를 당의 법정관리인으로 영입한 핵심적 동기는 김병준이 유명인사였기 때문이다.
이언주의 난이 언제쯤 종식되거나 진압될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문재인 정권이 경제정책에서 심각하게 죽을 쑤는 사태가 이언주의 난에 톡톡히 지원군 역할을 해주는 연유에서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원책의 난은 미수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 난이라기보다는 난동에 가까운 탓이다.
SNS 시대는 구조와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시대다. 원인을 건너뛰는 시대다. 이미지가 전부인 시대이고, 얄팍한 겉모습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놀아나는 시대다. 국회 국정감사장에 출석한 증인을 다짜고짜 ‘듣보잡’이라고 오만하게 능멸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민석 의원은 그와 같은 근본 없고 천박한 시대상을 온몸으로 앞장서 체현한 사례라 하겠다. 안민석 스스로는 자기가 더 유명해졌다며 싱글벙글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려운 시대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총체적 난국이다. 미국과 북한의 신경전 속에서 민생경제는 전면적 붕괴와 파탄의 길로 질주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나라를 이끄는 위정자들이 제대로 무게중심을 잡아줘야 하고, 확고한 무게중심은 일시적 유명함이 아닌 유장한 유능함에서 비롯된다. 필자의 오래된 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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