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편집위원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베푼 호의와 친절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면서도 왕의 품으로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날름 안기지는 않았다. 그는 돌돌 말린 융단을 펼쳐야 그 무늬가 선명히 드러나듯이, 사람의 얘기는 시간을 두고서 찬찬히 들어봐야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페르시아는 군주의 명령 한마디에 생사가 갈리는 전제왕정 체제였다. 왕으로부터 지속가능한 총애와 신임을 얻으려면 당연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1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는 해당 기간을 활용해 페르시아어를 부지런히 공부함으로써 마침내 통역관의 배석 없이도 왕과 자유롭게 대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외교관계를 다루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내의 여러 도시국가들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국내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 관하여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자문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이즈음 광범위한 영역에서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도의 수 싸움이 오가는 치열한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적국의 군주를 위한 책사 구실을 맡게 된 배경이었다. 그가 왕의 정치고문 역할을 담당하자 개혁에 저항하는 페르시아의 기득권 세력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이내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러나 왕에 더해 대왕의 어머니인 모후마저 테미스토클레스를 각별히 아끼고 신뢰한 터라 그들은 아테네 출신 망명객을 함부로 도모할 수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전통 종교의 사제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왕실의 기대에 지극정성으로 부응했다. 스파르타인 데마라토스가 페르시아 왕 앞에서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러 큰 벌을 받을 뻔했다가 무사히 넘어간 것은 순전히 테미스토클레스의 공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 조정에서 승승장구하자 역량 있고 야심만만한 그리스인들이 제2의 테미스토클레스를 꿈꾸며 페르시아로 속속 귀순해왔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영화 못잖은 권세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여 그리스의 인재들이 페르시아로 계속 유출되게끔 부추겼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가히 병 주고 약 준 격이었다. 왕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소아시아 서쪽 여러 곳의 넓은 땅들을 봉토로 하사하는 방식으로 약값을 후하게 지불했다.
페르시아 제국에는 테미스토클레스를 돌팔이 의사로 간주하는 세력이 만만찮게 존재하고 있었다. 프리기아의 지방관 에픽시에스는 자객을 보내 그의 목숨을 노렸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꿈에 나타난 여신이 ‘사자의 머리’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마을을 피해가라고 미리 계시해준 덕택에 암살자들이 휘두른 칼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자의 머리’에는 에픽시에스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이 테미스토클레스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음을 틈타 접근한 암살자들이 테미스토클레스가 묵고 있으리라 생각하고서 열어젖힌 장막 안에는 자객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잠복중인 페르시아 병사들로 우글우글했다. 실제로는 여신이 아니라 암살 계획에 가담한 일당 중 한 명이 음모의 전모를 사전에 밀고했겠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신이 그를 지켜주고 있다고 뻥튀기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마그네시아 지방에 단디메네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건립한 다음, 딸 므네시프톨레마를 그곳을 관리하는 신녀로 삼았다. 실상은 소유한 부동산을 공익재산에 기부하는 형식을 빌려 자식에게 증여한 것이리라.
잠시 방심한 탓이었을까? 페르시아에 테미스토클레스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가 꾸준히 생겨난 데에는 그가 망명객의 신분을 망각하고서 오만하게 행동한 이유도 작용했다. 그는 사르데이스에서 물동이를 든 처녀 형상을 한 여신상을 발견했는데, 이 조각품은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점령했을 때 전리품으로 빼앗아온 미술품이었다.
초패왕 항우는 관중 땅에 남아 중원 전체를 아우르라는 범증의 통찰력 있는 간언을 고향인 강동 지역에 가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건 비단옷을 입고서 밤길을 걷는 것 같이 모양새가 나지 않는 일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필부에게 걸맞을 뿐, 군왕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졸렬한 결정은 항우가 유방과의 천하 쟁탈전에서 패배하는 치명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서 크게 성공한 모습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문제의 여신상은 그가 아테네의 식수 공급을 책임진 관리로 근무할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의뢰를 받아 제작된 조각상이었다. 그러므로 조각상을 아테네에 반환하자는 의견은 리디아 지방을 다스리는 페르시아 지방관의 분노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지방관이 이 사태를 왕에게 보고하기로 결정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지방관의 첩실들에게 뇌물을 써서 가까스로 파문을 수습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고치 속에 들어간 번데기처럼 완전히 땅에 납작 엎드려 지내게 된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나무를 가만두지 않는 법이다.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이집트가 그리스인들의 지원 하에 불온한 동향을 보이고, 아테네의 명장 키몬이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함대가 키프로스와 킬리키아를 호시탐탐 위협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드디어 밥값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와의 새로운 전쟁에 총대를 메라는 명령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동포들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쓰라린 기억들은 이미 오래전에 추억 속의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는 아테네인과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애정도 없었지만, 증오 또한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싸울지를 후방에서 왕에게 조언하는 일과, 직접 전장에 출전해 그리스 연합함대를 상대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차원이었다. 그리스 전함과 격돌할 페르시아 함선에 전투원 자격으로 탑승하는 건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스러운 자기부정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제 65살의 나이가 되었다. 고대의 65세는 21세기 기준으로 100살 안팎의 연령대에 해당했다. 그에게는 더는 이루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없었다. 반면에 반드시 지키고 싶은 건 있었다.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살라미스 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명예로운 업적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신들에게 제의를 바치고는 친지들을 불러 모아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독약을 마셨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음독자살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았던 파란만장한 망명객을 향한 존경심이 한층 더 높고 깊어졌다. 왕은 유족에게 진심이 담긴 조의를 전달하고선 테미스토클레스의 가족과 지인들을 이후에도 변함없이 세심하게 돌봐줄 것을 신하들에게 분부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조국과의 동족상잔 대신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아테네에도 곧 전해졌고, 이는 고국에서 추방당했던 고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됐음을 뜻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무덤은 아테네 근방인 피레우스와 페르시아 제국의 마그네시아에 각각 하나씩 해서 통틀어 두 개가 만들어졌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후손들은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하는 시점까지도 마그네시아에서 평안한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철학자인 자신의 친구 한 명이 테미스토클레스의 후손임을 그의 책에서 공공연히 자랑했다. 아테네를 대표하는 명망 있는 역사가조차 결코 피할 수 없는 유혹이 깨알 같은 자기자랑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axnews.co.kr/news/view.php?idx=2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