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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 언더독의 운명에서 탈출하다 - 애국과 우정의 리더십 :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 (6)

공희준 편집위원

  • 기사등록 2020-05-07 13: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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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피다스의 지휘 아래 치러진 테귀라 전투는 전통의 군사강국 스파르타에 대한 다른 그리스 사람들의 패배자 심리(Underdog Mind)를 결정적으로 극복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지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언더독」의 극장용 포스터

스포드리아스가 피레우스 항구를 미욱스럽게 습격한 사건은 아테네와 테베를 연대시키는 끈끈한 접착제 구실을 했다. 새롭게 정식으로 동맹관계를 체결한 테베와 아테네는 전자는 육지에서, 후자는 해상에서 스파르타를 각각 괴롭히는 효과적 형태로 역할을 분담했다.

 

테베의 청년들은 스파르타군과 수시로 교전을 치르며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병사들로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테베의 군사들이 승리의 기쁨을 아는 몸으로 바뀐 데에는 펠로피다스의 공이 컸다. 그는 위험하기는 해도 패배하지는 않을 때와 장소를 적절히 선택해 라케다이몬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 테베는 펠로피다스를 명예와 실권이 두루 보장되는 관직에 지속적으로 임명함으로써 나라를 위한 그의 공로와 기여에 보답하였다.

 

펠로피다스가 담당한 직책들 가운데에는 300명의 남성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최정예 부대인 ‘신성대(Sacred)’의 총사령관 자리도 포함돼 있었다. 나중에 플라톤은 신성대를 그가 구상하는 전 세계를 거뜬히 정복할 위력을 지닌 이상적 부대의 원형으로 찬양하였다. 연인들로만 조직된 군대이므로 어떠한 고난과 시련도 변함없는 애정의 힘으로 기꺼이 함께 극복해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군대는 마케도니아의 신무기 앞에서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이는 한참 훗날의 이야기이다.

 

테베가 도처에서 스파르타에 거둔 일련의 승전들은 전면적 승리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테베는 정강산 시절의 모택동이 장개석을 상대로 구사한 유격대 전법으로 스파르타를 여기저기에서 괴롭혔지만, 스파르타 군대의 등뼈를 부서뜨리는 단계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오르코메노스는 그리스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다. 펠로피다스는 오르코메노스에 배치된 스파르타 수비대가 로크리스로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이곳을 공략하는 데 나섰다. 영락없는 교활한 빈집 털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소문과 달리 스파르타 수비대가 도시를 엄중히 방비하는 터였다. 스파르타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병력의 일부를 도시에 잔류시킨 때문이었다.

 

헛물만 켠 펠로피다스는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때마침 로크리스 원정을 마치고 주둔지로 행군해 돌아오는 스파르타군의 본대와 테귀라 지방에서 딱 마주쳤다. 테귀라는 멜라스 강이 넓게 흐르고 곳곳에 호수가 즐비한 습지였다. 따라서 신속한 도주를 허용하지 않는 난감한 지형이었다. 스파르타군의 돌연한 출현에 놀란 부하 하나가 적군에게 전군이 독 안에 든 쥐 꼴로 사로잡히게 생겼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하자 펠로피다스는 최대한 태연함을 유지하며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진짜 독안에 갇힌 건 다름 아닌 스파르타 녀석들이지.”

 

후세의 사가들은 테귀라 전투에 참가한 스파르타 측 병력을 500명에서 1천 명 사이로 추산하고 있다. 펠로피다스 휘하의 테베군의 숫자는 이와 비슷하거나 혹은 약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펠로피다스는 기병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다음, 그 바로 뒤에는 300명가량의 중장보병을 포진시켰다. 현대적 맥락에서 풀이하자면 전형적인 종심돌파 전술이었다. 양군의 교전이 시작되자 스파르타의 두 장수인 고르골레온과 테오폼포스가 이내 쓰러진 사실을 고려하면 펠로피다스의 작전계획은 성공적으로 주효한 듯싶다.

 

손쉬운 먹잇감인 줄 알았던 테베인들이 의외의 투지와 전투력을 발휘하자 스파르타의 장졸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들은 모세 앞에서 갈라진 홍해의 바닷물처럼 부대 전체를 좌우로 나눴다. 중간에 생겨난 틈을 통로 삼아 테베인들이 빨리 빠져나가도록 유도하려는 심산이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펠로피다스의 군대가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살려고 싸운다고 여전히 착각했고, 스파르타군의 착각은 라케다이몬인들의 손실을 키우는 자충수가 되었다. 적군이 터준 길을 이용해 테베가 더욱 사납게 스파르타 진영을 몰아붙인 탓이었다.

 

이윽고 전열이 무너진 스파르타군은 무질서하게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테베군은 적의 지원군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추격을 단념하고서 전리품 수집에 착수했다. 거창하게 승전비를 건립하는 행사 또한 당연히 뒤따랐다.

 

테귀라 전투는 본격적인 대규모 회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결정적 분기점을 이루는 결전의 싸움터로 자리매김했다. 테귀라 전투가 스파르타가 우월한 병력을 갖고도 패배한 최초의 정규전인 까닭에서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가 대등한 숫자의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패배한 사례마저 이전에는 전무했었다고 그의 「영웅전」에서 기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투는 고대 세계의 미드웨이 해전이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될 수 있었다. 미드웨이와 스탈린그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과 나치스 독일이 우세하거나 또는 백중한 전력을 보유한 상태에서 연합국에게 패전한 첫 전투였기 때문이다.

 

테귀라 전투 전에는 용감한 병사는 오로지 스파르타에서만 탄생하는 것으로 고대인들은 이해하였다. 이 싸움을 계기로 유능한 지휘관 아래서 체계적 훈련만 받는다면 어느 나라든 불명예를 죽음보다도 두려워하고, 패배를 비겁함보다 부끄럽게 여기는 우수한 병사들로 꾸려진 강력한 군대를 확보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인들이 깨닫게 되었다. 다른 폴리스들의 이와 같은 각성과,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불패의 신화를 이제껏 자랑하며 군국주의의 화신으로 군림해온 스파르타가 진정으로 뼈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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