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은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〇〇〇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글을 써야만 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새로 낸 책의 앞머리에.
머뭇거리는 홍석현 이사장에게 필자는 “제 아내 이름입니다”라며 빨리 서명해줄 것을 종용했고, 홍 이사장은 필자의 의도를 그제야 눈치 챘는지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는 주문받은 문구를 곧장 적어나갔다.
며칠 후에는 달력을 바꿔 달아야 하는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오후,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에 자리한 N빌딩에서는 「월드컬처오픈(World Culture Open)」이 주최하는 ‘평화와 문화의 밤’ 행사가 진행되었다. 월드컬처오픈은 공감과 창의의 문화를 만들어가려는 목적으로 전 세계 민간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한 단체이다. 어제 행사는 이 단체의 한국 지부가 마련한 송년회였다.
연말연시에 무수하게 열리는 것이 크고 작은 송년과 신년 기념 모임들이다. 월드컬처오픈의 송년회는 꽤 규모 있는 행사에 속했다. 그 연유는 이 글의 서두에 명시돼 있다. 한반도평화만들기의 이사장이자 중앙홀딩스의 회장인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월드컬처오픈의 좌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송년회는 홍석현 회장이 얼마 전 펴낸 신간인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도서출판 메디치)」의 출판기념회를 사실상 겸하고 있었다.
고발뉴스, 홍석현을 고발하기는 했는데
때마침 고발뉴스의 민동기 미디어 전문기자가 홍석현 이사장의 책에 관한 서평을 그가 일하는 매체에 무려 세 차례에 나눠 연재한 터이다. 고발뉴스의 간판격인 이상호 전 MBC 문화방송 기자가 언제부터인가 언론인 본연의 구실보다는 우국지사로서의 좌충우돌에 매진하는 까닭에 필자는 고발뉴스를 거의 보지 않아왔다. 언론인이 우국지사를 자처하는 순간 갈 길은 바로 지루한 꼰대의 길일 뿐인 탓이다. 그럼에도 나는 독설 반 야유 반의 민동기 기자의 서평만은 흥미롭게 모두 챙겨 읽었다. 다른 걸 다 떠나 일단은 기사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동기 기자가 필자에게 뜻밖에 선물해준 재미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저명인사들도 적잖이 참석한 월드컬처오픈 송년회 겸 홍석현 이사장의 출판기념회 행사를 방앗간에 쌀가마니 들어왔다는 소식 들은 참새마냥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행사는 무난했다. 필자가 행사장에 도착했을 즈음 장내는 조명등이 꺼진 채 요새 대세라는 락 그룹 퀸의 주옥같은 불후의 명곡들의 뮤직비디오가 틀어져 좌중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생전의 프레디 머큐리 본인은 사회의 부적응자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고 일갈했는데,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오히려 부적응자 취급을 받을 성싶은 분위기이다. 나는 해당 작품을 아직까지 관람하지 않았으니, 프레디 머큐리의 유지를 본의 아니게 우발적으로 계승한 셈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프레디 머큐리를 흠모해왔고, 그 일환으로 2012년도 초여름에 신성한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풀숲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난닝구 차림으로 사진을 찍어 내 트위터 계정에 올리기도 했다. 멋내려고 일부러 낸 구멍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입은 탓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구멍이었다.
나와 프레디 머큐리의 인연을 한참 추억하는 도중 장내의 전등불이 다시 켜졌고,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미모의 여성 아나운서의 사회로 본행사가 시작되었다. 외빈의 축사는 백영철 건국대 명예교수, 김홍걸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순서로 이어졌다.
대북관계는 임종석에게, 대미관계는 홍석현에게
나는 이어령 전 장관이 축사한 내용 자체보다 그가 여전히 과시하고 있는 열정과 활력에 더욱더 관심이 갔다. 이어령 전 장관은 1934년생으로 해가 바뀌면 우리나라 나이로 86살이 된다. 고령도 고령이거니와 그가 개인적으로 겪어온 마음의 고통을 감안하면 한마디로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나는 김홍걸 의장의 실제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의 부친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인의 한과 염원을 온몸에 받아낸 정치인이었다. 허나 김홍걸 의장은 전형적인 서울말씨를 썼다. 김 의장은 홍석현 이사장이 DJ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있다고 격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수야당에 대한 공격적 일침도 빼놓지 않았다. 민화협 상임의장 자리가 집권세력이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직위임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백영철 명예교수의 직설어법이 제일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았다. 백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데에서 홍석현 이사장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겨야 한다고 소리 높여 역설했다. 문재인 정부 대외정책의 왼쪽 날개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면, 오른쪽 날개는 홍석현 이사장이어야만 균형이 잡힌다는 판단이었을까? 필자는 백영철 건국대 명예교수에게 발언의 진의를 캐묻지는 못했다. 나는 취재가 직업적 사명인 기성 언론인이 아니니까.
홍석현이 회고한 DJ와의 독대는
마지막으로 연단에 등장한 인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이었다. 홍석현 이사장의 인사말에서 핵심적 부분만 간추려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4천 명의 문화기획자들(Culture Designer)이 월드컬처오픈의 활동가들로서 전국 곳곳의 지역사회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그분들 가운데에는 장애의 어려움을 극복하신 분도 계시고, 혁신적 교통안전체계를 개발한 청년 창업가도 계시다. 월드컬처오픈의 문화기획자들은 20년째 세계 전역의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방금 전에 축사를 해주신 이어령 선생님께서 바로 그 문화기획자 1호이시다.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가 출범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한반도평화만들기의 모태는 1995년에 백영철 교수님께서 주도해 결성한 「한반도통일포럼」이다. 나는 그 모임의 언론 분야 조력자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 시기에 보니까 후보자들마다 부실한 공약들이 속출했다.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국가의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세력이건, 진보진영이건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할 경우 나라와 국민을 위해 채택해 사용할 수 있는 정책공약들을 만들어냈었다. 당시의 경험이 나중에 한반도평화만들기를 창립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한때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한반도의 위험한 정세가 안정되면서 현재는 평화무드로 전환된 상태다. 그래서 우리는 「한반도 경제포럼」이라는 단체를 새롭게 덧붙여 꾸렸다. 요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모두가 다시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실현에 필요한 제반 준비작업들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에게 한반도 경제포럼 모임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다.
내가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결정적 계기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영국에서 귀국한 김 대통령께서 나를 일산 자택으로 부르셨고, 우리는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4시간이 넘도록 남북관계와 민족통일을 주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한반도평화만들기 재단의 씨앗은 그때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뿌려졌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평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갖고 있다. 함께 잘살아보자는 간절한 염원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의 힘을 통해 전 세계를 우애 있게 바꿔나가자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이를 이뤄내기 위해 더 분발하도록 하겠다. 내년 기해년에는 모두에게 만복과 건강이 깃들기를 소망한다.”
홍석현, 경기의 기선을 제압하다
남을 무너뜨리려면 먼저 나를 무너뜨려야 한다. 나를 무너뜨린다는 건 인생 막가는 대로 함부로 살자는 취지가 아니다. 내 안의 낡은 경계와 장벽을, 오래된 통념과 편견을 과감하게 무너뜨리자는 의미다. 그런데 고발뉴스의 민동기 미디어 전문기자가 격렬하게 성토해놓은 바대로 족벌언론의 사주이자 삼성재벌의 일원인 홍석현 이사장마저, 나를 무너뜨림으로써 상대를 무너뜨리는 이 중차대한 일에 야심차게 착수한 것처럼 보인다.
민동기 기자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를 진보로 자처하는 인물과 세력들이 진실로 심각하게 두려워해야만 할 사태는 홍석현의 본격적인 현실정치 개입이나 공공연한 대권행보가 아니다. 보수인사로 분류되는 홍석현 이사장에게 나를 무너뜨리는 싸움에서 기선을 제압당한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 결과로 정부여당의 지지도를 반등시켜주는 데 요구되는 시급한 전략과 효과적 대책을 둘러싸고 백가쟁명식의 논의가 여기저기에서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떠한 대책이 나오든 문재인 정권의 구성원들이 그들 내면에 들어선 낡은 장벽과 경계를, 오래된 통념과 편견을 지금같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고 있는 한에는 백약이 무효이리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기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주저 없이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홍석현의 광폭행보가 함의하는 교훈과 시사점을 청와대 수뇌부와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너무 늦기 전에 깨닫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