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의 발전과 관련된 일의) 시작은 김영삼 정부 때 했다. 내 주변에서는 옛날식 표현으로 빨갱이 사고라고 나를 이상하게 봤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진보 성향의 인터넷 언론인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의 일부를 옮겨봤다. 홍석현 회장은 현재는 ‘한반도 평화 만들기 재단’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북핵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효과적 해법과 동아시아 정치경제 공동체를 건설해나갈 장기적 방안을 찾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사장님도 빨갱이라니
내가 이렇게 거창하고도 긍정적으로 소개를 해놨기는 하지만 홍석현 이사장은 우리나라 상위 1프로, 아니 0.001프로 안에 포함되는 인물이다.
흑역사도 많다. 대표적 흑역사가 ‘사장님 힘내세요’ 사건이다. 국민의정부 시절 실시된 언론사 세무조사에서 그는 탈세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었고, 그가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자 몇몇 중앙일보 기자들이 “사장님, 힘내세요!”라고 응원의 구호를 외쳤다가 불미스러운 구설수에 오름으로써 오히려 사주를 더 난처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홍석현 이사장은 그의 매형이기도 한 삼성그룹 이건회 회장이 연루된 불법 비자금 사건이 불거질 적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고정출연을 하다시피 했었다. 한마디로, 그는 뼛속까지 한국사회 이너서클의 일원이라고 하겠다. 한국사회의 이너서클은 ‘친일사대 수구기득권 세력’이라는 장황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주홍글씨를 오랫동안 달고 살아왔다.
보수가 이념이 되면
그런 홍석현마저도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주장한다고 하여 빨갱이로 서슴없이 낙인찍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를 보수로 자임하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세계관이자 의식수준이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 당시 나름 선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공무원 연금제도 개혁과 같은 의미 있고 반드시 추진해야만 하는 중요한 국정 과제에 과감히 착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권이 9년 만에 어째서 비극적으로 불명예 퇴진하고,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이 왜 비참하게 영어의 몸이 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웃기면서도 슬픈 상징적 일화이리라.
보수의 뜻과 진보의 개념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무수하고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서구에서의 진보가 동양에서는 보수로 통하고, 어제의 보수가 오늘은 진보로 대접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보수는 구체적 실리를 추구하고, 진보는 추상적 이념을 지향하는 것으로 용어상의 대체적 교통정리가 이뤄진 상태다. 박정희 정권에서 출발해 전두환 정권을 거쳐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보수적 집권세력은 이 범주와 경계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중반 무렵에 다다르자 한국의 주류 보수는 구체적 실리가 아니라 자신들 고유의 추상적 이념을 좇는 집단으로 그 성격이 크게 변질되었다. 문제는 추상적 이념을 다루는 경쟁에서는 진보의 추상성이 보수의 추상성과 비교해 몇 배는 더 대중적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보수는 자신들이 잘하고 익숙한 싸움의 무대를 제 발로 빠져나와 백전백패이기 마련일 낯설고 물 설은 곳으로 알아서 들어온 것이다. 최대한 싸우지 않되 굳이 싸우려면 유리한 지세를 골라 싸우라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른 셈이었다.
평화는 최고로 남는 장사
홍석현 이사장의 인터뷰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나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가을 들어 갑자기 낮아진 수은주 탓만은 아니었다. 그 까닭은 홍석현 이사장이 승리하는 보수의 길을 다시금 개척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었다.
홍석현의 대북화해 노선은 추상적 이념이 아닌, 구체적 실리의 관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고, 남북관계의 평화적 발전이 구체적 실리의 관점에서 본격적 진전 단계에 돌입하게 되면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진보의 이슈에서 보수의 화두로 주도권이 급속히 넘어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황정민의 2005년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잠깐 빌리자면 진보가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밥상을 보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
나처럼 보수에 부정적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홍석현 이사장이 보수진영 내에서 아직은 소수파 신세인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노릇이 아니다. 허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저 유명한 명제대로 “만물은 유전”하기 마련이다. 홍석현이 보수진영 내에서 영원히 소수파로 남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는 보수의 부활과 재집권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너무 늦기 전에 이제라도 남북관계를, 한미관계를, 북미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향적으로 바꿔야만 한다. 외교와 안보는 기본적으로 실사구시에 기초한 이해관계의 영역이고, 이해관계의 영역과 보수세력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인 연유에서이다. 무모하게 물을 떠난 물고기의 운명이 어떤지는 이명박과 박근혜 두 사람이 이미 너무나 처절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