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上王)에도 계급(Class)이 있다
황교익 씨의 경기관광공사 사장 임명을 둘러싸고 당사자인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과 이낙연 전 국무총리 진영 사이에 빚어진 갈등과 대립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동귀어진으로 비화되려는 양상을 띠자 급하게 중재에 나선 인물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였고, 또 다른 한 명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였다. 언론과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문재인 정권의 상왕으로 표현해온 터였다.
유치원생들 사회에서조차 선후배가 있듯 상왕들 간에도 명확한 서열은 엄존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에 상왕과 상왕 위의 태상왕이 동시에 존재한 배경이다.
이해찬과 김어준 가운데 누가 깃털 상왕이고, 누가 범털 상왕일까? 물론 김어준이 실세 상왕인 현직 상왕이고, 이해찬은 상대적으로 끗발이 달리는 전직 상왕이다. 이를테면 이낙연 측과 황교익의 후견인인 이재명 경기지사 측 모두에게 더 이상 확전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김어준은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마이크에다 대고서 몇 마디 이야기하는 걸로 충분하지만, 이해찬 전 대표는 분쟁의 한 축인 황교익 씨에게 번거롭게 전화를 걸어 그간의 경위와 자초지종을 세세히 설명해야만 한다.
일개 칼럼니스트에 불과한 황교익을 직접 전화통화까지 해가며 위로해줘야만 하는 작금의 현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하늘을 나는 새도 당장 떨어뜨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였던 서슬 퍼런 시절의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이해찬 입장에서는 대단히 서글프고 굴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과거에는 황교익이 무진장 애를 썼어도 이해찬과 말을 섞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언감생심이었으리라.
대부 이해찬, 플랫폼 김어준
김어준이 갑이 되고 이해찬이 을이 되는 권력이동이 여권 내부에서 일어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유야 뻔하다. 김어준은 끊임없이 활동영역을 게걸스럽게 팽창하는 플랫폼 역할을 지향하고, 이해찬은 제한된 범위만을 지배하는 특정한 계파의 대부 노릇에 열중해온 데 있다.
대부는 부하들에게 부와 권력과 명예를 적당히 나눠줄 뿐이다. 대부에게 충성을 바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자리와 더 나은 이름값이 반대급부로 제공된다. 허나 대부는 휘하의 조직원들이 다른 분야로 진출해 자기만의 다채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건설ㆍ구축할 수 있는 데 필요한 도움과 협력까지는 베풀지 않는다. 이해찬의 계보원들이 아무리 승승장구해도 여의도 정치건달의 위상과 한계를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해온 까닭이다.
반면에 플랫폼은 해당 플랫폼의 이용자들이 각자가 목표한 행선지로 출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승강장(Platform) 기능을 담당한다. 남한사회의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일반대중으로부터 싸늘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로는 김어준의 사람들이나 이해찬의 사람들이나 매한가지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어준의 사람들은 굳이 여의도 정치건달 생활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독립된 생존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어준의 사람들은 이해찬의 사람들과 다르게 예컨대 공기업 감사 자리를 주요한 비즈니스 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김어준의 세계는 밖을 향해서는 매우 독재적이다. 그러나 안으로는 나름 민주적이고 자율적이다. 이해찬의 세계는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몹시 타율적이며 통제적이다. 이해찬과 핵심 심복들의 관계가 재벌회장과 그룹 계열사 사장의 권위주의적 의존관계라면, 김어준과 주요 측근들의 관계는 유튜브와 인기 유튜버의 동업자적 공생관계이다. 이해찬은 심복들을 말 잘 듣는 직원처럼 여기지만, 김어준은 측근들을 우수 이용자로 대우한다.
지금은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뛰어넘어 메타버스(Metaverse)로 불리는, 우리 목전에 펼쳐진 현상적 세계와는 아예 처음부터 심급과 층위를 달리하는 생소하고 다차원적인 새로운 개념의 세계마저 인구에 공공연히 회자되는 세상이다.
수동식 타자기조차 희귀했던 탓에 등사기 밀어서 인쇄물 찍던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해찬이 PC 통신과 인터넷 시대와 모바일 전성기를 차례로 거치고 급기야 멀티버스 지평에마저 은근슬쩍 발을 들여놓으려는 김어준의 하위 동맹자(Junior Partner)로 전락ㆍ편입된 일은 일찌감치 예정된 필연적 사태였다. 문제는 지난 몇 주 동안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유권자들 앞에서 주로 연출한 광경은 김어준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해찬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려 시도하는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④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