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티’, 국민 유행어로 등극하다
김어준 총수의 욕망이 커짐과 정비례해 딴지일보가 조선일보의 아류이자 짝퉁으로 변해가는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어왔다. ‘김어준판 코리아나 호텔’의 완공은 그 오래고 지속적인 변질과정의 화룡점정이 될 걸로 전망되고 있다.
“오빠도 영포티야?”
추석 이튿날 밤이었다. 필자가 길을 가는데 부부 또는 오래된 연인 사이로 생각되는 평범한 남녀 한 쌍이 바로 앞에서 걷고 있었다. 여성이 동행한 남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약간 놀리는 어투로 위와 같이 물었다. 궁금증이 발동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추월한 다음 남자 쪽을 살짝 훔쳐봤다. 전형적인 40대 중후반 남성의 얼굴이었다. 그래봤자 나보다는 어렸지만….
‘영포티’가 세간의 화제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갑남을녀마저 거리낌 없이 사용할 정도면 확실한 대세로 자리 잡았다고 말해도 허언이 아닐 테다. 이 단어가 조기에 대세로 정착한 이유를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아픈 곳을 워낙 정확히 찌른 덕분이다.
왕년의 X 세대에 198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를 더하면 영포티 범위에 거의 오전히 해당할 듯하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몹쓸 짓을 저질렀기에 후배 세대에게 지독한 혐오와 경멸이 대상이 됐을까? 영포티들의 위선과 이기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게 아마도 핵심적 원인일 성싶다.
위선적이기로는 영포티의 직계 선배 세대일 86 세대도 만만치 않다. 오죽하면 ‘똥팔육 세대’라는 입에 올리기 민망한 비아냥까지 생겨났겠는가? 그런데 86 세대는 소싯적에 민주화에 대한 나름의 기여와 희생이 있었다. 반면, 영포티 세대는 민주주의의 혜택을 순수하게 누리기만 해왔다는 측면에서 후배 세대인 MZ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문제는 영포티 세대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신화의 혜택까지 덩달아 만끽했다는 사실에 있다. 영포티들은 현재의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극심한 취업난과 주택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민주화에도 무임승차해, 고도성장에도 무임승차해, 단군 이래 이렇게 편안히 꿀 빠는 세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임승차자들은 대개 조용하기 마련이다. 괜히 쓸데없이 시끄럽게 굴었다간 동티가 나긴 십상인 탓이다. 한국의 영포티 세대의 특이점은 그들이 유난히 소란스러운 세대란 데서 발견된다. 민주화 운동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었던 세대임에도 정치적으로는 무책임할 만큼 과격하고, 청년세대와 견주어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롭고 풍요로운 세대인데도 밥그릇 투쟁에서만은 압도적인 최강의 전투력을 과시하곤 한다. 패션은 혁명의 기린아 체 게바라인데, 뱃속은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인 모순적 존재가 대한민국 영포티 세대인 셈이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영포티 세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해왔다. 왜냐? 김어준은 영포티들의 위선과 무임승차를 합리화하는 구실과 핑계를 꾸준히 개발하고, 영포티들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딴지일보에 일용할 양식을 부단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영포티들이 보내는 맹목적 응원과 무조건적 지지가 김어준을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대부 김조순 못잖은 막강한 권세가로 만들어줬다. 영포티들의 두둑한 지갑은 총수가 거액의 은행 대출을 받아가며 아무나 하지 못한다는 부동한 시행업으로 은근슬쩍 진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구축해줬다. 개미와 진딧물, 악어와 악어새, 말미잘과 흰동가리 못잖은 완벽하고 환상적인 공생관계라 하겠다.
딴지일보는 어떻게 ‘조딴일보’가 되었는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달도 차면 결국은 기우는 법이다. 조선일보는 보수언론과 제일 밀착된 정치인으로 평가되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전성기에 망조가 들었다.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의미하는 안티조선 운동도 이 무렵 태동했었다.
딴지일보의 쇠락은 김어준 총수의 최고의 동맹군인 영포티 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돈 잘 버는 부자 세대로 떠오른 순간 시작되었다. 젊고 가난한 청년세대가 김어준을 선출되지도 않고, 책임지지도 않고, 교체되지도 않은 부당한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밤의 대통령’으로 인식한 순간이 바로 이때였다.
딴지일보는 조선일보의 패러디를 지향하며 출범했다. 그러나 지금의 딴지일보는 조선일보와 세 가지 불미스러운 공통점을 지닌 엽기적인 조딴일보가 되고 말았다.
첫째로, 언론이 아닌데 언론인 척한다는 점이다.
내가 오래전에 김어준을 만났을 때 총수는 “우리는 언론이 아닙니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했었다. 조선일보를 유사언론으로 맹렬하게 비판했던 김어준의 딴지일보 스스로 유사언론이 된 현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둘째로, 부동산에 대한 의존도가 비정상적으로 커졌다는 점이다.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조선일보가 코리아나 호텔의 홍보용 찌라사에 불과하다고 성토했다.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수십억 원의 은행 대출금을 끌어온 김어준의 모습은 영락없은 부동산 개발업자의 행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셋째로, 나이든 꼰대들이 독자층의 주축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늙는 게 나쁜 게 아니다. 늙으면서 고집이 세지고 독선적으로 변하는 것이 추할 따름이다. 조독마 즉 ‘조선일보 홈페이지 독자 마당’은 그 이용자층의 구제 불능에 가까운 고루함과 폐쇄성 고루함 때문에 젊은 누리꾼들로부터 야유와 빈축을 샀었다. 작금에는 딴지일보와 그 독자들이 과거의 조독마 이용자들을 능가하는 배타성과 완고함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조선일보와 그 독자들이 젊은이들로부터 극혐이 된 것과 똑같은 이유로 딴지일보와 그 독자들 또한 수많은 청년들로부터 극혐을 당하고 있다.
힘 있고 부유한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의 반감과 거부감의 표적이 되는 사태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다만 한때나마 창의성과 발랄함을 필살기로 자랑했던 딴지일보의 그 독자들이 오늘날에는 남한에서 단연 경직되고 구태의연한 집단으로 퇴락한 역설적 상황이 무척이나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정리하자. 영포티는 어째서 욕을 먹을까? 장강의 앞물인 주제에 장강의 뒷물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어서이다. 3급수 주제에 1급수라고 사기를 치고 있어서이다. 수구기득권 주제에 혁명의 전위인 양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서이다.
2025년 추석은 저 징그럽고 조직적인 생쇼와 사기와 코스프레에 머잖아 종지부가 찍힐 것을 확인하는 지루하면서도 의미 있는 명절 연휴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결연히 외치고 싶다. “명랑사회 구현을 위한 노력은 똥꼬 깊숙이 계속돼야 한다!”고.

-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