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앞서서 몽골이 있었다
모택동과 신생 중국공산당은 강대한 적들과 싸움으로써 그 스스로 강대해질 수 있었다. 이는 미미한 적들과 싸움으로써 그 스스로 미미해지고 있는 이준석과 신생 개혁신당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세계제국은 전 세계를 무대로 국력 투사가 가능한 국가를 뜻한다. 과거의 대영제국 즉 영국과 현재의 미합중국, 곧 미국이 세계제국의 전형적 사례들이다. 전 세계적 차원의 국력 투사는 쉽게 설명하자면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국은 정식 세계제국이 아니었다. 독일제국의 도전과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에 동시에 응전해야만 했던 대영제국은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한반도와 만주에서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는 숙제를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한껏 기세가 오른 일본 제국에게 외주를 두었다. 이른바 영일 동맹(Anglo-Japanese Alliance)이었다. 러시아에 기대어 국가의 생존을 근근이 도모했던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의 운명은 영일 동맹의 체결을 계기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고 셈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영국조차 힘에 부쳐 지레 포기한 양면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성공적으로 감당해냈다. 미 해군의 막강한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광활한 서태평양을 휩쓸고 다니며 수많은 일본군 장병들을 황천길로 보내버리는 바로 그 시간에, 수천 대의 미군 폭격기들이 독일의 주요 도시와 중요한 산업시설들을 하나둘씩 잿더미로 만들어갔다.
소련의 양면 전쟁은 가짜 양면 전쟁이었다. 미영 양국과 함께 연합군의 주축을 형성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이 패망한 연후에야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소련군이 일제의 괴뢰국가인 만주국과의 국경선을 넘은 사건은 한반도 허리에 38선이 그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영국이 양면 전쟁을 벌일 능력이 없는 탓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소련이 무늬만 양면 전쟁을 개시하는 바람에 한민족은 남북분단의 고통과 비극을 겪게 됐다.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적 차원의 양면 전쟁을 치른 국가가 아니었다. 최초의 양면 전쟁을 펼쳐 두 개의 전선 모두에서 승전고를 울린 나라는 그보다 800여 년 전인 13세기 전반기에 등장했다. 다름 아닌 몽골제국이다.
창업주 칭기즈칸이 사망한 다음 몽골제국의 지배층은 두 가지 고민에 맞닥뜨렸다. 첫째는 누구를 위대한 정복 군주의 후계자로 결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둘째는 선대가 유업으로 남긴 정복 전쟁을 어디에서 속개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의 해결은 한동안 유예되었다. 반면, 두 번째 문제의 해답은 곧바로 도출되었다. 군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서쪽인 유럽으로, 다른 한 부대는 남쪽의 송나라로 각각 말머리를 돌리면 되었다.
병력이 양분됐음에도 서쪽으로 진군한 부대는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영토를 수월히 점령했다. 남쪽으로 전진한 부대는 비록 중간에 고전은 했을지언정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최대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였던 남송을 마침내 손아귀에 넣었다.
우리는 전성기의 몽골제국을 생각할 때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무진으로 질주하는 천하무적의 몽골 기병을 자연스레 뇌리에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10만 명 남짓한 말 탄 군사들만으로 당대에 구대륙의 인류에게 알려졌던 문명 세계의 거의 전체를 무릎 꿇린 칭기즈칸과 그의 후예들의 위용과 업적에 재차 감탄하곤 한다.
한데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정말 10만 명 안팎의 몽골 기병의 힘만으로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드라드)부터 호지명(구 하노이) 시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무서운 기세로 공략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10만 명의 몽골 기병을 그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보병부대가 뒤따랐다. 그들은 때로는 공병대가 되어 적군이 농성하고 있는 성채들을 함락시키는 데 필요한 공성 장비의 제작을 담당했고, 때로는 수송대가 되어 식량과 마초 등의 귀중한 군수물자의 운반을 책임졌다.
몽골군은 도시를 공격할 경우 이전에 사로잡은 적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사용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강제로 동원된 인간방패들을 내세워 개별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 자체까지 승리를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몽골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역설했던 헤게모니 개념의 충실한 선구자였다. 그들은 외부적 강제의 요소와 자발적 동의의 측면이 변증법적으로 융합된 헤게모니 전략을 명민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정복지를 확대해나갔다.
10만 명의 토종 기병에 다양한 이민족 출신의 90만 명의 보병을 결합해 100만 대군을 뚝딱 만들어낸 몽골제국의 비결은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라는 제목의 책에 함축적으로 소개돼 있다.
“사람의 재능을 평가하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한 것은 테무진 칸의 핵심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날랜 기병은 테무진의 몽골에만 있지 않았다. 몽골족과는 숙적 관계였던 인접한 케레이트 부족에게도, 더 동쪽의 타타르족에게도, 몽골 서편의 나이만 부족에게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탕구트 족이 세운 서하 왕조와 여진족의 금나라는 더 큰 규모의 기병대를 보유했었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는 몽골에게 허무하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왜냐? 몽골에게는 있었던 확장성이 부재한 탓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은 능력만 있다면 가문과 혈통을 묻지 않았다. 종교와 사상도 따지지 않았다. 발랄할 개방성과 통 큰 포용력이 10만 기병이 90만 명의 보병에 더해져 순식간에 100만 대군으로 증식하는 마법을 부렸다. 예전에 몽골과 싸웠던 적군들을 포섭하고 동화시켜 충원된 90만 명의 보병이 몽골군에 새로이 합세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홍군(紅軍)이 지고도 커졌던 까닭은
이제 시선을 13세기 초 몽골고원에서 21세기 초의 한반도 남쪽으로 돌려보자. 비유하자면 이재명과 이준석도, 한동훈과 심지어 김문수마저 10만 명의 기병은 수하에 거느린 형국이다. 관건은 먼저 어느 정치인이 어제의 적들을 설복하고 흡수하여 백만 대군을 편성하는 데 요구되는 90만 명의 보병을 확보하느냐에 달렸다.
10만 명의 기병에 90만 명의 보병을 이어붙이는 데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단연 열심이다. 이재명의 우클릭 보법과 중도확장 노선은 10만 명의 기병만 갖고서는 당권을 차지할 순 있어도 정권을 잡을 수는 없다는 뼈저린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의 내란 진압에 거침없이 나선 동기도 10만 명의 기병만 데리고서는 아무리 잘돼봐야 일개 부족장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의 결과물이었다.
이재명이나 한동훈과는 대조적으로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윤석열 밑에서 종군했던 패잔병들을 주로 긁어모으는 데 적극적이다. 90만 명의 보병 따위는 필요 없고 10만 명의 마적들만 새로 어떻게든 그러모으면 장땡이라는 식의 지극히 안이하고 퇴영적인 발상법이자 정세 인식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준석 전 개혁신당 의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기존의 10만 기병에 90만 명의 보병을 더하여 100만 대군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한 술 더 떠 10만 명의 기병들에 대한 대대적 숙군 작업에 착수한 모양새이다. 10만 명에서 얘는 이래서 미우니 쫓아내고, 쟤는 저래서 걸리적거려 몰아낸 후에 황산벌의 계백 장군을 흉내 내 5천 결사대라도 결성하겠다는 심산인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중은 현대 중국을 건국한 모택동에 관해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혁명의 광풍만 기억하게끔 장기간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한마디로 모택동에 대한 부분적 진실만 접해왔을 따름이다.
집권 종반기에 접어들 즈음의 노년의 모택동과는 달리 청년 시절과 중년 시기의 모택동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 적마다 주변에 사람이 늘었다.
대장정의 고난의 행군 과정에서 무수한 동지들이 국민당 군대와의 교전으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인 연안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강산의 본래 근거지를 출발할 무렵의 군세를 이내 회복했다. 국공합작과 항일전쟁과 2차 국공내전을 차례로 치러내며 모택동이 지휘하는 병력은 무려 400만 명으로 폭증하게 된다. 모택동이 칭기즈칸처럼 재능을 중시하며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는 용인술을 채택한 덕분이었다.
이준석은 어떨까? 남한 사회의 주류 진보진영은 그를 차갑고 매정한 능력주의의 신봉자라며 격렬히 비판해왔다. 그렇다면 이준석 주변에 유능한 인재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작고 미미한 적들만 상대하다 자기 스스로도 작고 미미해지는 이준석의 ‘축소지향의 정치’의 치명적 맹점과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직언하는 참모가 없는 점으로 미뤄 보건대 이준석 근처에 능력 있는 인사들은 별로 없다고 해야 올바른 평가일 터이다. 안철수 의원은 선거를 하면 할수록 그를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는커녕 되레 줄어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는 이준석이 안철수와 과연 얼마나 다른지를 모르겠다.
이준석은 자신이 사람의 능력만 본다고 강조하지만, 그는 능력을 고려하기 전에 해당 인물의 입장부터 살펴보기 일쑤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흑묘백묘론를 좇아도 부족할 판국에 입장을 같이하는 고양이들에게만 입장을 허용한다는 ‘입장주의’를 고집한다면 외연 확장은 언감생심이고, 양질 전화의 전제조건인 지지자들의 양적 팽창은 어불성설이다.
설상가상 격으로 이준석 의원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쟁점들, 이를테면 전장련 시위나 동덕여대 사태가 대한민국의 거시적 미래와 장기적인 국가진로에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파급영향을 미칠지도 불확실하다. 전장련 시위 대책을 토론하고 동덕여대 학내 소요 해법을 궁구할 시간에 차라리 전경련과 서울대 패권주의를 정면으로 다루는 게 더 담대하고 진취적인 광폭 행보이리라.
필자의 주장은 이준석 의원 귀에 물론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들린다 한들 “요즘 젊은 남자들 사정에 어두운 늙은 아저씨의 푸념”쯤으로 치부될 게다.
그러나 이준석이 이 두 가지 사항만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늙은 아저씨들이 수십~수백만 명이 모이면 정권의 향방을 판가름할 수 있음을. 청년기와 중년기의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원들이 봉건 군벌과 매판자본가와 전 세계 제국주의자들 대신에 이준석과 그의 핵심 지지층이 작금에 하듯이 자국의 젊은 여성들을 일차적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면 거대한 중국 대륙은 탐욕스러운 열강들이 서로 이권을 다투는 각축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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