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이 나갑니다」에서 「보수의 종말」까지
하늘 위에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뜰 수 없는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밤하늘에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떠오를 수는 없기 마련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과 신인규 전 국민의힘 상근 부대변인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준석과 신인규는 한국 정치의 태양이 아직은 되지 못했다. 반면에, 달이 되는 단계까지는 현재 나아간 것으로 평가될 수가 있다. 두 사람을 동렬에 놓고서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건 여전히 무리일 터이다. 이름값과 영향력, 지지자들의 숫자에서 이준석이 신인규와 견주어 압도적으로 우월한 이유에서이다. 이준석이 밤하늘을 훤히 비추는 꽉 찬 보름달이라면, 신인규는 이제 막 가느다랗게 빛을 내기 시작한 자그마한 초승달에 비견될 수가 있으리라.
필자는 이준석 의원과 신인규 전 대변인 두 사람 전부와 책으로 얽혀 있다. 2021년 여름에는 이준석을 주제로 하는 정치평론서인 「이준석이 나갑니다(도서출판 오픈하우스)」의 제작에 기획자 겸 공저자로 참여했다. 그로부터 만으로 3년 3개월 가량이 경과한 2024년 가을에는 정치 대담집인 「보수의 종말(도서출판 오늘의 미래)」을 신인규와 함께 엮어냈다.
이준석과 신인규가 현재 원만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면 필자의 도서 영업에 지금쯤 매우 유리한 환경이 조성돼 있을 터이다. 허나 세상일이 어찌 내 맘대로만 술술 풀리겠는가? 그저 이 모든 상황을 나의 부덕의 소치로 여기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듯싶다.
나는 국민의힘에서 당대표와 대변인 관계로 한솥밥을 먹었던 이준석과 신인규가 어떠한 동기와 경위로 결별하게 됐는지에 대해 대강은 들어 알고 있다. 왜 대강만 알고 있느냐?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설령 자세히 알고 있다 한들 어느 한 사람을 편들어 다른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동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준석과 신인규, 신인규와 이준석 가운데 누가 옳았는지는, 어느 쪽의 선택이 현명했는지는 결국은 시간과 민심이 가려줄 게다.
이준석과 그의 지지자들이 들으면 전연 수긍이 되지 않을 소리일 테지만 관건은 이준석이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희망하고 기대했던 것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지난 3년 3개월 동안 이준석은 집권당의 최연소 당수가 되었고, 독자적 신당을 창당해 그 되기 힘들다는 원내 정당으로 만들었으며, 이준석 본인은 차기 대선 주자군의 일원으로 번듯하게 자리매김했다. 이준석이 충분한 성장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진단과 견해에 이준석과 그의 지지자들이 불쾌해할 까닭일 터이다.
여기에서의 성장은 무엇이 됐는지가 기준이 아니다. 무엇을 하려는지가 준거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소위 이대남으로 통칭되는 제한된 범위의 특정한 인구 집단만이 환호하고 반응하는 현안과 쟁점이 아니라. 민중 다수의 관심과 동의를 견인할 수 있는 역사적 화두와 국가적 의제여야만 한다.
나는 이준석에게 완벽한 성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가 담대한 시도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감동하고 응원하는 입장이다. 이준석에게는 무언가를 시도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남북관계의 평화적 발전과 관련해 과감한 제안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한데 이준석이 남북관계와 관련해 시도한 일이라곤 대북전단 금지법은 위헌이라고 뒷북치기로 논평하는 게 거의 전부였다.
이준석은 한국사회의 양극화 해소와 불평등 극복에 대해 전향적 정책 제시를 시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과 연관해 연관하여 이준석이 한 일이라고는 전철연과 드잡이하고, 동덕여대 사태에 대해 한마디 보탠 것 정도만이 특별히 기억날 뿐이다.
일부 장애인 단체의 활동 방식이 거칠고 무례하며, 동덕여대생들의 남녀공학 전환 반대 투쟁 방법에 무도하고 폭력적인 측면이 뚜렷한 건 물론 분명하다. 하지만 천하의 이준석의 사회경제적인 우선적 관심 대상이 전경련이 아닌 전장련이라면, 게다가 이준석이 망국적인 서울대 패권주의가 아니라 동덕여대 교내의 울긋불긋한 페인트칠에 더욱더 분개하고 있다면 이는 쑥스럽고 남우세스럽다 못해 슬프고 씁쓸한 노릇이다.
신인규는 작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지 말아야
이준석은 리더 곧 지도자로의 성장을 시도할 기회 또한 허다했다. 하지만 이준석 역시 윤석열 못잖은 ’성공의 저주‘에 빠진 모습이다.
지금의 이준석을 성공시킨 주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각종 방송 프로그램들에서의 종횡무진 맹활약이었다. 그런데 성공한 방송인 이준석이 성공한 지도자 이준석의 탄생과 등장에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그는 독서하고 사색해야 마땅할 시간에마저 방송 중독자처럼 이곳저곳 방송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준석은 단 하루라도 방송을 쉬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체질이란 말인가.
이준석과 신인규의 충돌은 미국의 유명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유행시킨 ‘투키디데스의 함정’ 프레임에 전형적으로 해당할지 모른다. 전통 강호와 신흥 강호의 대결은 필연적이라는 게 앨리슨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내용물의 요지이다.
이준석은 스파르타처럼 전통의 강국일 수 있다. 신인규는 아테네 같은 신흥 강국일 수가 있다, 아니, 신인규는 신흥 강호는커녕 여전히 약소국 신세에 머무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본질은 이준석의 성장세가 현저하게 꺾이면서 이제는 신인규 같은 약소국들도 이준석의 아성과 패권에 도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넉넉히 얻게 됐다는 점이다. 과거 까마득해 보였던 이준석의 벽이 더는 높게만 느껴지지 않는 셈이다.
이런 자신감을 과연 신인규 혼자만 갖게 됐을까? 이준석의 세력이 당장은 아무리 강대한들 이준석의 역량과 도량은 산술급수적 속도로 성장하는데, 그의 잠재적 도전자들과 예비 경쟁자들의 실력과 그릇이 기하급수적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라면 추격과 역전의 허용은 단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이준석의 성징이 멈추면서 그의 지지자들의 성장도 아울러 멈췄다. 나는 이준석의 지지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무분별한 좌파 딱지 붙이기가 공공연히 성행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준석의 정치적 성장세가 둔화됨을 계기로 이준석 지지층의 이념-그들에게 만약 이념이란 게 존재한다면-이 급속히 우경화하고 있다는 불길하고 꺼림칙한 신호로 해석됐던 탓이다.
이념적으로는 나날이 보수화되고, 작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습성이 체질화된 지지자들에게 정치인 본연의 역할과 사명은 중차대한 국가적 일들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방송에 나와서 속된 말로 입이나 잘 터는 짓쯤으로 생각되는 게 아닐까?
이준석 의원이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므로 꿩 대신 닭이라고 신인규 전 대변인을 향한 부탁과 당부를 조금 해보련다. 신인규는 이준석 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작업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대신에 이준석의 무엇이 그의 성장을 정지 또는 정체시켰는지 진지하게 숙고해주길 바란다.
언론 특히 방송에 대한 지나친 의존, 근본적 원인이 아닌 지엽적 사안과 표피적 현상에의 집착, 분단구조로 표현되는 민족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인문학적 소양의 상대적 부족, 여의도 정치권과 용산 대통령실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신변잡기에 대한 과도한 몰두,
이준석의 그와 같은 한계와 맹점들을 자신이 혹여 답습·재연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인규가 스스로를 늘 경계하고 성찰했으면 좋겠다. 기득권 구태 정치꾼들에게 저성장은 죄가 아니겠으나, 젊은 정치인들에게 성장이 멈추거나 지체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 커다랗고 치명적인 과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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