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 진중권, 장비 변희재
필자는 올해 1월 중순부터 홍희경 서울신문 기자와 함께 유튜브 방송을 새롭게 시작했다. 제목은 「강남의 소리」이다. “보수도 강남, 진보도 강남”인 한국정치의 뉴 노멀(新常態)을 능동적으로 선도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담대한 포부를 담아 야심차게 작명한 브랜드이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 관한 인물평을 방송에서 다루게 되었다. 「강남의 소리」의 실질적 사주(?)인 홍희경 기자까지도 2012년 늦가을에 펼쳐진 「사망유희 토론배틀」에서 진보논객의 대명사 진중권이 그에게 견주면 한참 하수로만 세간에 인식되어온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에게 예상 밖으로 완패한 이변의 원인을 몹시 궁금해 했다. 천하무적 진중권이 그가 평소 듣보잡이라며 조롱해온 보수논객 변희재에게 인터넷상의 은어로 왜 떡실신을 당하고 말았는지를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홍희경 또한 의아하게 생각해온 터였다.
나는 삼국지연의에 빗대어 승패를 가른 요인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삼국지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 3형제가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막내 장비가 동탁의 부하인 여포를 상대로 호로관에서 대등하게 싸우며 빚어낸 놀랍고 화려한 투지 넘치는 분전에 있었다.
여포는 당대 최고의 맹장이자 무사였다. 장비는 아직은 그저 힘만 센 일개 병졸에 불과한 처지였다. 명성과 무예 전부에서 애당초 장비는 여포의 적수가 도저히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포를 만나자마자 곧장 저승 구경을 하고 만 내로라하는 여타의 장수들과는 다르게 어찌하여 장비는 여포와의 일대일 맞대결에서 사실상의 승리로 평가되는 값진 무승부를 거둘 수가 있었을까?
여포는 최선을 다해 장비와 싸웠다. 장비는 죽을힘을 다해 여포와 겨뤘다. 최선을 다한 여포로서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드는 장비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여포가 장비를 성공적으로 제압하고 싶었다면 여포 역시 장비처럼 죽을힘을 다해 싸움에 임해야만 했다. 허나 여포에게는 장비만큼의 절박함이 모자랐다.
그렇다. 진중권은 최선을 다해 변희재와 토론을 벌였다. 변희재는 죽을힘을 다해 진중권과의 논쟁에 나섰다. 설령 진중권이 「사망유희」에서 변희재에게 진다고 하여도 진중권은 여전히 진중권이었다. 반대로 변희재는 본인이 기획하고 제안한 행사에서마저 진중권에게 밀린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모든 유무형의 자산을 깡그리 잃을 판국이었다. 전쟁에서건, 선거에서건, 토론에서건 최고의 강력한 필살기인 절박함이, 간절함이 변희재의 무기고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까닭이다.
평민 김용민의 운명
변희재의 죽을힘은 잠시잠깐 동안만 지속된 일회성의 ‘원 포인트’ 죽을힘이었다. 진중권과의 「사망유희」에서 죽을힘을 다한 경우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휘한 사력이었다. 다른 일들에서는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준에 머물러왔다.
김용민 평화나무 이사장은 진중권과도 변희재와도 정치적 노선과 이념적 지향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그간 견지해온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에서도 앞의 두 사람과는 현저하게 차별화된다. 친문세력과의 단기필마의 싸움에 뛰어들며 비로소 난생 처음으로 죽을힘을 다하는 중인 진중권과 달리, 「사망유희 토론회」에서 딱 한 차례 죽을힘을 다해본 변희재와는 다르게 김용민 PD는 너무나 오랫동안 죽을힘을 다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용민은 구태여 죽을힘을 다할 동기와 명분이 결여된 사안들에조차 쓸데없이 사력을 기울이곤 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고약한 천형처럼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있는 막말 파문의 오명과 상처는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굳이 무리하게 끼어들 이유와 필요성이 없는 사건에 그가 온몸의 체중을 실어 참전한 데서 그 몹쓸 사단이 비롯되었다. 그때의 오버와 지나침이 나중에 업보가 되고 후과가 되어 김용민에게는 영원한 고통의 원천이 돼버린 셈이다.
김용민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죽을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말 못할 개인적 사정과 배경이 있었다. 한때 장안의 서버들을 마비시킬 지경으로 승승장구한 「나는 꼼수다」의 구성원들을 일별해보자. 정봉주는 전직 국회의원이었다. 김어준은 딴지일보 총수로서 이미 유명인이었다. 주진우는 언론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진보적 시사주간지의 나름 검증된 민완기자였다. 김용민은 현재의 필자처럼 경력에서도, 인맥에서도, 평판에서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뒷배도 없고, 후광도 약한 평범한 무명의 생활인 출신의 김용민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과 책무에 그가 새내기 라디오 PD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늘 습관적으로 해오던 방식대로 “닥치고 죽기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악바리같이 매사에 목숨 걸고서 무지막지하게 덤벼들지 않으면 쟁쟁한 동료들과 막강한 경쟁자들 틈에서 금방 도태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낙오될 게 분명했다. (③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