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84학번”
한국사회를 경악과 분노의 도가니에 빠뜨린 성남 대장동 게이트의 몸통을 자처하는 김만배 전 머니투데이 법조팀장의 이력에서 필자는 두 가지 지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먼저 성균관대 즉 성대의 독특한 위치이다. 한국사회에서 서울대와 연고대 이외의 대학들 가운데 이른바 ‘주요대’로 호명되는 대학교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주요대의 첫머리에 오는 학교들이 서성한으로 약칭되는 서강대와 성균관대, 그리고 한양대이다.
필자는 80년대 끝물에 대학을 다녔으므로 현재의 대학문화가 어떤지 모른다. 솔직히 관심도 없다. 대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성세대의 대다수는 후학들이 어떻게 학문을 닦고 있고, 후배들이 사회에 나와서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수십 년째 대학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대학교에 흘러넘치는 이런저런 돈들, 이를테면 등록금과 정부지원금 따위에 빨대를 꽂으려는 목적에 있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진정으로 청년세대를 사랑하는 중장년들은 대학 캠퍼스 방면으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믿음을 오랫동안 견지해오는 중이다.
얘기가 잠시 엇나갔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1980년대 대학을 다닌 남녀들이 대한민국에서 장차 출세할 수 있는 길에는 두 가지 길이 눈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혹은 대기업에 입사해 제도권으로 성공하는 길이었다. 둘째는 집회와 시위에 열심히 참여해 운동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길이었다.
첫 번째 경로는 SKY로 불리는 학교들에서 즐겨 채택되었다. 두 번째 경로는 주요대가 아닌 그냥 대학교 학생들이 주로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땀 흘려 열심히 데모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운동권판 코리아드림이 ‘그냥대’ 학생들을 시위현장으로 불러내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작용했음은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이 빚어졌느냐? 거의 모든 학교들에서 제도권과 운동권이 교유할 기회는 좀처럼 드물었다. 설령 친분을 나눈다고 하여도 대등한 협력관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제도권과 운동권 중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세력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했던 탓이다.
여기에 예외로 자리한 학교들이 셋 있었다. 서두에 언급된 서성한, 즉 서강대와 성균관대와 한양대이다. 이 세 학교는 열심히 공부하면 제도권에서 출세할 기회가 쏠쏠히 있었다. 성실하게 투쟁하면 운동권에서 성공할 가능성 또한 은근히 높았다.
그러므로 이 세 학교 출신들로 정치권에서 잘나가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제도권과 운동권이 비슷한 비율로 분포ㆍ혼재된 양상을 띤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 같은 전형적인 공안검사와 유은혜 현 교육부 장관 유형의 왕년의 운동권 프리마돈나가 사이좋게 동문회에서 회합할 수 있을 구조적 배경이다.
무슨무슨 게이트로 통칭되는 거대하고 음습한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본인은 힘없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강변하는, 억울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둘러대는 범죄자들과 연루자들이 많았다. 김만배 씨는 자기 자신이 몸통이자 주범임을 자청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이례적 경우에 속한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멀쩡히 산 사람 희망사항이야 수리해주지 못하겠는가? 필자는 김만배의 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그를 사건의 중심에 놓고서 논의를 이어갈 참이다.
김만배가 대주주로 있는 자산관리회사인 화천대유는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에서 어마무시한 액수의 천문학적인 규모의 불로소득을 수취했다. 화천대유와는 동전의 양면 관계인 천화동인의 대표자는 김만배의 성균관대 동문인 이한성 씨이다. 이한성은 이화영 전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이화영 역시 성대 출신이다. 김만배 전 팀장은 학창시절에는 나름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펼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화영 전 의원은 평균적인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김만배, 이한성, 이화영 전부 왕년의 운동권 학생들로 분류되어도 무방한 사람들인 셈이다.
문제는 이 운동권 학생들 무리 틈새에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점이다. 곽상도는 박근혜 정권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게다가 지역구마저 보수의 본산 대구에 소재한 영락없는 보수꼴통 정치인이다. 허나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과 정황들을 종합하면 곽상도와 나머지 성대 운동권 3인방은 별다른 거부감과 이물감 없이 어울린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가면 제도권에서 성공한 동문이요, 뒤로 가면 운동권으로 출세한 동창생인 ‘배산임수의 학맥’을 김만배 씨는 영악하고 약삭빠르게 이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운동권 출신과 제도권 출신이 서로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아무런 항체반응 없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소통한 결과가 무엇이냐? 한쪽의 부정과 비리가 다른 한쪽으로 옮겨 붙는 사태를 차단시키는 역할을 해줄 진영 간의 비판과 견제의 방화벽이 완벽히 제거되고 말았다. 운동권과 제도권이 그들만의 대동세상을 이루며 해먹어도 정말 크게 제대로 한탕 해먹을 수 있었던 원인이다.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함께한 성대 동문들 사이에 벌어진 형태의 ‘부패의 팬데믹’은 특정 학교의 경계선을 이미 아주 일찌감치 훌쩍 뛰어넘어 586 세대 사회 전체에서 외형과 속도와 범위만 조금 달리한 채 공통적이고 전방위적으로 확산ㆍ관찰된 현상이기도 하다. 누구네 학교가 누구네 학교를 신나게 욕해봤자 결국엔 누워서 침 뱉기만 돼버리는 형국이다. (②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