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의 고난의 행군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명랑사회 구현을 선도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에서 시대착오적 유훈정치를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꼰대의 대명사로 바뀌는 데에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계기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혹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이 김어준을 급속히 퇴행시킨 결정적 원인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김어준의 정치적이고 인성(人性)적인 변화는 그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돼온 터이므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김어준이 발랄한 자유주의자로부터 케케묵은 봉건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분수령으로 여기는 시각은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일차원적 단견이리라.
개인의 가족사는 건드리지 않는 게 본디 ‘디지털 무림세계’의 불문율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남의 가족사를 건드리는 인물은 자신의 가족사도 건드려질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김어준 총수가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의 이혼 경력을 공개적으로 떠들썩하게 언급하는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윤희숙을 정치권의 벼락스타로 단번에 만들어준 「저는 임차인입니다」란 제목의 국회 본회의장 연설은 허위광고는 아닐지언정 과장광고에는 분명 해당한다. 윤희숙은 세입자이기 앞서서 부유한 다주택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희숙이 허황된 과장광고를 서슴없이 불사한 사실이 “저 여자 알고 보면 이혼녀”라는 식으로 윤희숙을 인신공격해도 된다는 명분과 정당성을 김어준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남의 이혼이 나쁜 일이면 나의 이혼도 덩달아 나쁜 일이 되기 마련이다. 김어준 총수도 알고 보면 윤희숙 의원 같은 돌싱이다. 그가 어떤 구체적 사유로 부인과의 이혼을 결심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닷컴 거품(Bubble)이 갑작스럽게 꺼진 직후에 딴지일보의 경영상황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총수의 개인적 삶도 이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명장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해 전국이 들썩거릴 무렵 딴지일보는 직원들의 월급은 물론이고 외부 필자들의 원고료마저 제때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회사 전체적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었다.
그로 인해 그 중요하고 역사적이며 파란만장했던 2002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딴지일보는 똥꼬 깊숙이 선거에 개입하기는커녕 변변한 논평 하나 내지 못할 지경으로 거의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어준 최악의 흑역사로 수시로 인구에 회자되어온 성인용품 판매 사업은 당시 심각한 자금난을 타개하려는 목적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육지책의 성격이 강했다.
김어준, 새천년민주당 분당으로 기사회생하다
딴지일보의 쇠락과 더불어 조용히 잊힐 뻔했던 김어준에게 구사일생의 재기의 기회가 찾아왔다.
태평양전쟁에서 원자탄을 두 방이나 얻어맞으며 완벽히 패전한 일본은 개항과 명치유신 전의 암울하고 후진적인 농업국가 시절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한반도에서 김일성의 인민군이 이승만이 통치하는 남한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6ㆍ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대한해협 건너 열도로 전해지며 일본 조야는 일제히 만세삼창을 불렀다. 일본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지원하는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영악하게 수행하면서 자본주의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한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확고한 발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의 대북송금특검과 이의 자연스러운 후속편인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는 김어준 총수에게는 일본을 구원한 한국전쟁과 엇비슷한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전연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횡재였다.
노풍의 진원지 구실을 해가며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쾌거에 일조한 지식인 사회와 논객 집단은 대북송금특검과 민주당 분당, 그리고 친노 신당인 열린우리당의 창당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반쪽이 나고 말았다. 더 엄밀히 말하면 86 세대에 속하는 관변학자들과 영남 출신 친여 글쟁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노풍의 주역들은 반노로 돌아서거나 혹은 비노의 길을 걸었다. 어제 이회창 낙선과 김대중 정부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함께 힘을 합쳤던 사람들이 오늘은 서로 등을 돌리고서 험악한 저주와 상스러운 악담을 주고받았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키고자 밤새워 글을 쓰고 논리를 개발하던 식자들과 누리꾼들이 대거 빠져나간 자리를 누군가는 채워야 했다. 김어준은 그 공백을 슬그머니 능숙하게 메우며 2002년 대선 국면에서의 쑥스럽고 치욕적인 ‘무활약’을 일거에 만회할 회심의 호기를 맞이하였다.
새천년민주당 분당이 도둑처럼 찾아오면서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유명 인사는 김어준 이외에도 한 명 더 있다. 현재는 김어준과 죽어라 싸우는 진중권 전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이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소속의 권영길 후보를 돕겠다며 민노당 지지자들의 온라인 집결지였던 진보누리를 무대로 삼아 여러 가지 자충수와 무리수를 차례로 범한 탓에 진보논객 진중권은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어버린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으로 내몰려 있었다. 오죽이나 상실감과 고독감이 컸으면 거창한 고별사를 남기고 유럽으로 전격 출국했겠는가? 진중권이 독일로 떠나며 남긴 회한 가득한 논조의 글이 워낙 비장하고 서글펐던 터라 사람들은 그가 논객질에서 완전히 손을 뗀 다음 아예 이민을 가는 걸로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실제로는 2~3개월 가량 잠시 바람을 쐬러 가는 일종의 도피성 외유임이 드러나면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황당하게 했다. 중권이 형이 허무개그에도 은근히 일가견이 있다. (⑤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