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은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갈바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오토는 군심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이미지는 모택동의 어록을 인용하고 있는 JTBC 뉴스 화면
티겔리누스 휘하의 군단병들 역시 늙은 황제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갈바 황제는 군대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유를 황위를 승계할 후사가 없는 데서 찾았다. 마침내 그는 양자를 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황제의 의붓아들로 선택된 주인공이 유력 가문의 자제인 마르쿠스 오토였다.
오토는 낭비벽이 심하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포파이아 사비나의 전 남편이기도 했다. 포파이아는 다름 아닌 직전 황제의 황후였다. 곧 네로의 아내였다.
포파이아의 남성 편력은 막장극 수준이었다. 그녀는 본디 크리스피누스의 부인이었으나 오토와 눈이 맞은 터였다. 크리스피누스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며 뻔뻔스럽게 시작된 바람둥이 오토와 요부 포파이아의 결혼 생활은 머잖아 파경에 이르렀다. 이는 포파이아가 오토와 불륜 관계를 맺기 전부터 이미 네로 황제의 내연녀였던 탓이었다.
권력은 네로가 가지고 있었지만, 씀씀이는 오토가 훨씬 더 컸다. 그럼에도 사치의 아이콘 오토와 구두쇠의 대명사 네로는 죽이 척척 잘 맞았다. 포파이아가 네로와 오토에게 골고루 사랑을 나눠준 덕분이었다. 포파이아는 결국은 오토와도 이혼한 다음 네로와 살림을 차렸다, 오토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포파이아의 무한한 권력욕까지 완벽하게 채워줄 수는 없는 까닭에서였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대가로 이번에는 자기가 피눈물을 흘리게 된 오토는 네로에게 당연히 앙심을 품었다. 네로 쪽에서도 오토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오토가 황제와의 의리를 배신하고 포파이아와의 이혼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부하들을 시켜 모후인 아그리피나를 교살했을 만큼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잔인무도한 인간이었다. 한때 네로와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포파이아도 종국에는 이 미치광이 황제로 인해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러므로 네로가 오토의 누이를 죽인 사건은 황제의 난폭한 성정을 고려하면 별로 충격적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네로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오토의 목숨만은 끝내 빼앗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저술한 「영웅전」에서 네로가 오토를 죽이지 않은 걸 수수께끼 같은 일로 묘사했다.
오토가 폭군의 치하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던 데는 네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의 도움이 컸다. 세네카는 네로에게 오토를 루시타니아, 즉 현재의 포르투갈 전역을 포함하는 이베리아 서남부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파견할 것을 권유했다. 루시타니아는 제국의 서쪽 변방 땅이었다. 오토는 목숨은 부지했으되 유배를 당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토의 좌우명은 어쩌면 ‘수처작주(隨處作主)’였는지 모른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했다. 루시타니아의 오토는 수도에 머물던 시절의 오토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괄목상대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자비로운 목민관으로 변신했다. 여자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특유의 고질적 엽색 행각도 과감히 중단한 듯하다.
따라서 갈바가 네로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오토가 제일 먼저 호응한 행동도, 반란군에 가담한 오토의 결정에 루시타니아 지방 인민들이 전폭적 지지를 보낸 상황 전개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오토는 수중에 소유하고 있던 각종 금은보화를 비롯한 재물들을 갈바의 군자금으로 아낌없이 보탰다. 그는 갈바가 로마로 진군하는 동안에는 새로운 황제 곁을 잠시도 비우지 않았다.
오토의 용의주도함은 새로운 권력 실세로 부상한 비니우스에게 납작 엎드린 영악한 처세술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오토는 비니우스보다는 몇 수 위였다. 평판 관리에 무관심했던 비니우스와 달리 오토는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갈바가 황제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병사들에 대한 포상과 진급에도 앞장섰다. 갈바의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황제의 비서들을 챙기는 일 또한 오토의 몫이었다.
오토는 황제를 즐겁게 하고자 자주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오토는 그때마다 황제를 호위하는 병사들에게 두둑이 뒷돈을 챙겨줬다. 그는 이러한 행동이 황제의 권위를 높여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군에 대한 오토의 장악력을 강화하려는 치밀하고 전략적인 포석이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격언을 오토는 정치권력이 창칼에서 창출된 시대에 일찌감치 선구자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난세에는 군심(軍心)이 민심을 종종 압도하는 법이다.
오토의 기름칠이 주효했는지 비니우스는 그를 갈바의 후계자로 강력하게 천거했다. 오토와 비니우스 사이에 은밀한 이면계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오토가 갈바의 후계자로 지명되는 즉시 비니우스의 딸과 결혼한다는 물밑 거래였다. 황제가 동의한 흥정이었으므로 오토는 이제 꽃길만 걸으면 되는 듯싶었다.
황제는 후계 구도에 관한 공식적 발표를 계속 미적거렸다. 갈바는 오토의 낭비벽이 여전히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즈음 오토는 500만 데나리우스의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갈바를 계승해 황제에 즉위한 오토가 이 막대한 금액의 개인 부채를 나랏돈으로 갚으려 한다면 국가가 혼란스러우질 게 뻔한 노릇이었다.
이듬해가 되었다. 갈바는 오토를 비니우스와 더불어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오토의 영향권 아래 시나브로 들어간 대다수 장병들은 집정권 인사를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으로 간주하며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다음 회에 계속…)

-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