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꿈꾼 최후의 인생역전
1945년 봄, 히틀러의 제3제국은 사방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동쪽에서는 수천 대의 소련군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수도 베를린의 턱밑에까지 육박해 있었고, 서쪽에서는 수백만 명의 미군과 영국군 대병력이 라인강을 건너 루르의 공업지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있었다. 히틀러가 몇 달째 은신·칩거해온 이른바 총통 벙커에는 침통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만이 무겁게 감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소식이 대서양 저편에서 들려 왔다.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미국 동부 현지 시간으로 그해 4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급보였다.
루스벨트는 미국 내에서도 나치 독일을 향해 가장 강경한 자세를 견지해온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고립주의와 전쟁 불개입 노선을 고집하는 야당 공화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무기 대여법을 시행해 독일의 주요한 적국인 소련과 영국에 막대한 분량의 군수 물자를 공급했다.
일본이 진주만에 배치된 미 태평양 함대를 기습한 사건은 독일과 정식으로 전쟁을 벌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루스벨트에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 놈 뺨 때려준 격이었다. 히틀러가 민주주의의 병기창으로 칭해질 정도로 거대한 산업생산 능력을 보유한 신세계, 곧 미국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추축국의 일원인 일본 제국을 편들어 미합중국에 눈치 없이 선전포고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독일에 대항해 결성된 연합국의 통일전선이 붕괴하면 전황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 기대·주장해온 터였다. 건강 이상설이 끊임없이 나돌던 루스벨트의 돌연한 죽음으로 그의 예상과 바람이 드디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총통의 지하호 안에서는 왁자지껄한 축하잔치가 열렸다.
히틀러의 측근들 가운데 한 명은 총통이 독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이 극적인 인생역전을 맞이할 거라는 아부를 잊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상대로 무모한 전쟁에 돌입했었다. 세계사에 ‘7년 전쟁’으로 기록된 싸움이다.
윤석열이 주도한 12·3 내란 사태의 주요 종사사인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의 표현대로 프로이센은 중과부적으로 말미암아 패망 일보 직전의 위기로 내몰렸다. 바로 이 순간, 러시아 제국의 제6대 황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갑자기 숨을 거뒀다. 엘리자베타가 죽은 지 6개월 후에 쿠데타로 집권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로이센과 강화 협상을 벌임으로써 프리드리히 2세는 운 좋게 구사일생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끝내자 다른 동맹국들도 전열에서 속속 이탈하면서 프로이센에 대한 열국의 단단했던 포위망이 시나브로 풀려버린 덕택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죽음을 러시아 통치자의 사망에 빗대는 간교한 아첨꾼의 그럴싸한 이야기에 히틀러는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전쟁에서 발을 빼면 영국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게 뻔했다. 그러면 히틀러가 오랜 세월 소망해온 나치스 독일과 볼셰비키 러시아의 영혼을 건 ‘일대일 맞다이’가 마침내 성사될 수가 있었다.
물론 이는 하루짜리 백일몽에 불과할 뿐이었다. 루스벨트로부터 대통령직을 자동승계한 해리 트루먼은 독일과 일본 두 파시스트 국가와는 어떠한 타협도 없을 것임을 명확히 밝히며 양국의 무조건이고 즉각적인 항복을 강력히 촉구했다. 루스벨트가 세상을 뜬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보헤미아의 상병‘ 즉 히틀러는 비극적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말기의 히틀러는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파킨슨병에 걸렸음은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극도의 스트레스에 따른 심각한 수면장애 증상은 기본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총통의 주치의로 근무하는 돌팔이 의사 모렐 박사가 무분별하게 처방한 약제들이 히틀러를 심각한 약물중독 상태에 빠뜨렸다. 윤석열에게 무절제한 음주벽이 있었다면, 히틀러에게는 모렐이 시도 때도 없이 주사하는 정체불명의 각종 의약품이 있었다.
히틀러가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처럼 무속신앙에 깊이 심취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루스벨트가 죽었다는, 독일 입장에서의 낭보가 전해지자 어느 참모가 히틀러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 운세를 거론하며 이제부터 총통의 운때가 다시 트이기 시작했다는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놨다는 한심한 후일담만은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천문학자 케플러의 고향이자 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아인슈타인을 길러낸 전통의 과학기술 대국 독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망상적인 주술적 소리를 해댄 참모를 총통이 그 자리에서 크게 나무랐다는 얘기는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종말을 앞둔 히틀러 역시 허황하고 근거 없는 미신에 기대어 본인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려 했던 걸로 생각된다.
악의 평범성을 뛰어넘었을 악의 코믹성
전 국군 정보사령관 노상원은 윤석열 일행의 내란 음모에서 기획자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노상원은 부하 여군에게 몹쓸 집을 저질러 불명예 전역을 당했다. 군문에서 수치스럽게 쫓겨났으니 우리나라 직업군인들의 노후 대비책이자 경제적 의지처일 군인연금 수급 자격 또한 응당 박탈됐을 것이다. 따라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만 했고, 그가 현역 시절부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명리학 지식을 살려 안산에서 보살을 자처하며 점집을 개업·운영한 일은 어쩌면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자연스러운 자구책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노상원이 복권 긁는 심정으로 군사 쿠데타에 나섰다. 그는 남은 평생 성범죄자의 불명예를 안고 사느니 차라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름 거사에 착수했던 듯싶다. 그가 어린 청소년들의 재잘거리는 수다 소리로 왁자지껄한 롯데리아 매장에서 현역 장교들을 불러모아 쿠데타를 모의하는 장면은 엽기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이다. 히틀러도 왕년에 뮌헨의 한 맥줏집을 근거지로 삼아 폭동을 일으켰었다. 재야인사(?) 시절의 히틀러는 노상원에게, 나치 정권 말기의 히틀러는 윤석열에게 각각 빙의된 모양새이다.
그러나 우리는 롯데리아서의 역모를 단지 희화화된 모습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테러리스트가 폭발물을 샤넬 파우치 속이나 에르메스 손가방 안에 넣고 운반한다고 하여 그 치명적 살상력이 줄어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면, 이번 12·3 친위 군사반란 책동의 최악의 악당(Villain)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엮어내는 흥미로운 사주풀이에 있었던 셈이다.
‘악의 평범성’은 독일 태생의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집단학살 범죄의 중요 종사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광경을 예루살렘에서 직접 참관하고 창안·역설한 개념이다. 악의 평범성과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을 ‘악의 코믹성’을 자기를 불명예 제대시켜 한적한 변두리 동네의 낡고 좁은 다세대 주택 골방에서 고작 역술인 노릇이나 하게 만든 우리 사회를 겨냥한 극도의 원망과 무시무시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을 한국의 어느 전직 장성이 작금에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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