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왕은 주나라의 마지막 임금이다. 유왕 시대 이후에 주나라는 도읍을 낙읍으로 옮겨 500여 년을 더 존속했으나 제후들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한 허수아비 천자들의 나라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유왕의 여인 포사는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으로 유명하다. 포사의 매력에 흠뻑 빠진 유왕은 그녀를 즐겁게 해주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현세 화백이 그려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장편 스포츠 만화인 「고독한 외인구단」의 주인공 까치 오혜성이 현실에서 실제로 구현된 인물이 다름 아닌 유왕이었다.
까치는 지금은 경쟁 구단 선수의 여자가 돼버린 사랑하는 여인을 기쁘게 해주려고 중요한 야구 경기 도중에 고의로 결정적 실책을 범해 상대팀에게 승리를 헌납한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는 낭만적 캐릭터로 묘사된 오혜성은 알고 보면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승부 조작을 자행한 악질 범죄자였다.
그러나 오혜성은 유왕에 비교하면 약과였다. 유왕은 헐레벌떡 달려온 각지의 제후들과 그들 휘하의 병사들 모습에 포사가 미소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짜 봉화를 번번이 올려 장수들과 군사들을 지치고 짜증 나게 했다. 문제는 나중에 오랑캐가 진짜로 쳐들어와 급히 봉화를 올렸는데도 제후들이 단 한 명도 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후들은 이때의 봉화를 유왕이 포사를 웃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또다시 장난 삼아 피운 엉터리 봉홧불로 여겼다.
지원군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도성인 낙읍은 쑥대밭이 되었고, 유왕은 적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잃었다는 게 사마천을 위시한 후세의 사가들이 입을 모아 통탄해 마지않는 주나라 멸망 과정의 전말이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포사의 행방과 생사는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침략자의 여인으로 팔자를 고치지 않았다면 유왕을 뒤따라 들판을 뒹구는 외로운 백골이 되었으리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 봉화가 올랐다는 건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비상계엄이 선포됐음을 뜻했다.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한 경우 조정은 봉화로 이 사실을 사방의 백성들에게 알렸다.
대통령 윤석열이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에 느닷없이 봉홧불을 피웠다.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올린 영락없는 가짜 봉화였다. 그 가짜 봉화 때문에 국민은 밤잠을 설쳤고, 수백 명의 국군 장병들이 졸지에 반란군 무리가 되었다. 나라를 통째로 거덜 낸 유왕의 거짓 봉화와 달리 윤석열의 거짓 봉화는 그나마 윤석열 본인과 부인 김건희, 그리고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을 비롯한 윤석열의 심복들과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을 파멸시키는 수준에서 불행 중 다행으로 수습될 전망된다.
윤석열이 얼마나 황당하고 심각한 망상의 세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지는 그가 최종 가필을 했을 게 뻔한 이른바 계엄사 포고문 1호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저 정도면 머잖아 내란죄로 재판정에 서게 될 윤석열이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해도 재판부기 그의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판이다. 정상적인 맨정신의 사람의 가진 견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기와 객기와 취기가 계엄사령부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조돼 나온 살벌하고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 포고령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탓이다.
때로는 나에 대해 남들이 더 정확히 볼 때가 있다. 필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걸 억지로 참으며 짧은 어학 실력을 총동원해 윤석열의 실패한 12·3 친위 쿠데타에 관한 다른 나라 언론들의 논조와 분석을 대략 살펴봤다. 해외 유수의 외신들은 이구동성으로 김건희를 향한 윤석열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곧 미친 사랑을 요번 쿠데타를 초래한 핵심적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렇다. 유왕이 웃지 않는 미녀 포사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를 수시로 올리다 나라를 들어먹었다면, 윤석열은 나름 털털하게 잘 웃는 것처럼 보이는 아내 김건희를 지켜주려고 무리하게 비상계엄을 강행했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정치적 자산마저 단번에 전부 홀라당 말아먹었다. 윤석열의 정치적 파산은 당사자인 윤석열은 물론 사랑하고 소중한 아내 김건희까지 장기간 ‘법정관리’ 하에 놓이는 비극적 결말로 귀착될 확률이 부쩍 커졌다.
혹자들은 부부 모두를 감옥에 가두지는 않으리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예측을 하고 있다. 나는 내외 모두 영어의 몸이 되리라고 확신하는 입장이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예측의 대상이 되기에는 그간 보여준 윤석열의 행동과 김건희의 행태는 너무나 기괴하고 파행적이었다.
필자는 애초에는 대통령 윤석열의 아내인 영부인 김건희와 여당 대표 한동훈의 배우자인 변호사 진은정의 갈등을 주제로 한 연작 칼럼의 대단원을 약간의 유머와 가십을 섞어 내리려 했다. 이러한 계획을 윤석열이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두 사람의 대결이 진은정의 부전승으로 싱겁게 끝났기 때문이다.
호사가들이 잔뜩 기대했을 김건희와 진은정의 미모 경쟁과 패션 대결은 성사가 영영 불가능해졌다. 조만간 남편과 함께 한남동의 대통령 관저에서 강제 퇴거를 당할 운명인 김건희는 화장과 염색이 철저하게 불허되는 공간에서 우중충한 단색의 헐렁한 제복만 입고서 아주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격리된 생활을 해야만 할 게 확실시된다.
이는 김건희가 그럴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간에 일국의 최고 권력자인 한 남자를 사랑에 눈멀어 나라를 망친 철부지 사랑꾼으로 만들어놓은 대가일 터이다. 익명의 용산 대통령실 관계자가 자랑스럽게 떠벌렸다는 “우리 여사님은 경국지색이세요”라는 말이 그야말로 씨가 된 셈이다.
정수라가 오래전에 불렀던 「난 너에게」를 언급하며 시작한 이 글을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의 가시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매듭지으련다. 왕년에 엄청 잘나갔던 어느 늙고 병든 사내가 교도소 영창 밖에서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사랑하지만 더는 자유롭게 볼 수는 없는 여인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로 이 이상은 없을 테니까.
그녀는 너무 예뻤다.
그래서 더 슬펐다.
하늘에 별은 빛났다.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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