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선거의 여왕의 탄생
선거에 처음 출마하려는 지인들로부터 괜찮은 선거기획사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필자는 억울하게 바가지를 뒤집어쓰는 느낌이 조금 들지언정 여의도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유명하고 검증된 선거 컨설턴트들이 운영하는 기획사를 찾아갈 것을 권유하고는 한다.
내로라하는 선거기획사들에게 일을 맡긴다고 반드시 당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다. 힘들게 선거에서 이긴 다음 허망하게 당선무효가 되는 횡액을 당할 위험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왜냐? 여의도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선거 컨설턴트들은 짧게는 수개월부터 길게는 1~2년에 달하는 선거운동 기간에 후보자가 해야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관해 꼼꼼하고 분명하게 교통정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는 검증된 선거전문가들 대신에 세간에서 도사 또는 법사로 불리는 괴이하고 수상쩍은 인사들을 데리고 대선을 치렀다. 그리고 운 좋게 이겼다.
밖으로는 당시의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친문재인 진영과 친이재명 세력으로 나뉘어 분당 없는 분당 상태로 치달았고, 안으로는 후보 단일화만 이뤘다면 국민의힘 경선에서 윤석열을 여유 있게 따돌렸을 홍준표와 유승민이 끝까지 독자 완주를 고집한 덕분이었다. 만약에 운이 능력의 8할을 차지한다면, 2021년 여름에서 2022년 초봄 사이의 윤석열은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단언하건대 최고의 능력자였다.
그러나 대출에도 한도가 있듯이, 운에도 한도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운발 총량의 법칙’이 냉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문제는 운으로 성공한 인물들은 백이면 백 운을 능력으로 착각하기 쉽고, 이러한 운명적 착각에서 21세기 남한 정치판 제일의 행운아일 윤석열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행운의 선물에 가까웠던 대통령 선거에서의 초박빙 승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기고만장하게 했을 개연성이 높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면 끼어들지 말아야 할 곳에 끼어들고, 간섭하지 말아야 할 때 간섭한다.
여권의 중진 정치인인 김영선 전 의원의 거취와 관련해 김건희 여사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지루하고 소모적인 진실 공방의 양상으로 흐르는 분위기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지적대로 영부인의 선의의 조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러 진보 성향 매체들의 분석처럼 현직 대통령 배우자의 불법적인 공천 개입일 수도 있다.
사태의 핵심은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전을 여의도의 유명하고 검증된 선거 컨설턴트들이 아닌 출처 불명의 근본 없는 법사 혹은 도사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김 여사가 스스로를 고도의 정무감각을 소유한 불세출의 정치 천재로 인식하게끔 됐다는 데 있다. 김건희 여사가 본인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버금가는 ‘선거의 여왕’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누가 김건희를 한강 다리로 등 떠밀었나
인간이 극단적인 자아도취 상태에 빠지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기 딱 좋은 환경이 자연스레 조성된다.
서울중앙지검이 김건희 여사의 디올 명품가방 수수 사건에 대해 한국의 검찰 역사에 두고두고 부끄러운 오점으로 남을 볼썽사납고 치욕스러운 출장 조사마저 불사해가면서 무혐의 결론을 내린 일은 가뜩이나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김 여사에게 빨리 광폭 행보에 나서라며 대놓곤 등을 밀어댄 꼴이었다. 이제 인간 김건희에게 겸손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고 만 셈이다.
양상훈 주필은 저 악명 높은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들 중에선 특이하게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 논조를 견지해왔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아왔다. 그 양상훈이 김건희 여사를 염두에 두고서 자사의 지면에 읍소와 애원으로 가득한 희대의 ‘영부인 전상서’를 쓴 광경을 접하며 나는 가슴이 서늘해지고 뒷골이 댕겼다. 제왕적 대통령도 모자라 급기야 제왕적 영부인마저 등장한 탓이다.
양 주필은 표면적으로는 김건희 여사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고 윤석열 대통령을 설득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상훈이 실제로 하소연하는 대상은 윤석열이 아니라 김건희임은 굳이 행간을 살피지 않아도 단박에 파악할 수 있을 터이다. 천하의 조선일보 간판 논객이 대통령의 아내에게 전ㆍ현직 여당 당수와 화해할 것을 처연하게 애걸하는 가히 초현실주의적 풍경이었다.
현실은 길고 초현실은 짧다. 영부인이 대통령 머리 위에서 상왕 노릇을 하며 권력의 일인자로 행세하는 초현실적 상황은 조만간 종식되리라. 민중은 짧은 초현실의 시간 동안 이름난 정치인들이 보여준 반응과 행태에 기초해 긴 현실의 시간에 누가 집권하는 게 그나마 나은지를, 누가 절대로 정권을 잡아선 안 되는지를 판단할 것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심판의 시간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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