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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카이사르를 아느냐 법률 기술자들이 판치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2024-06-18 00:45:17

윤석열 정권은 “선거에서 백번 이기느니 재판에서 한번 이기는 게 낫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정치권 안팎에 결과적으로 퍼뜨리고 있다. 이와 같은 비뚤어진 사조는 여당과 야당의 구분 없이 현재 역병처럼 확산돼가는 중이다. 이미지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의 문제점을 진단한 MBN 시사 프로그램 방송

“너 자신을 알라”, 서양 철학사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서양 종교사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서양 정치사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내부에 적힌 문구였다고 한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를 논쟁에 인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이 기독교를 전 세계적 보편 종교로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본토와 갈리아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인 루비콘강을 그에게 충성하는 군단병들을 이끌고 건너며 했다는 이야기로 이제껏 알려져 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그런 얘기를 발설한 적어 없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은 “주사위를 던져라”였다는 게 영웅전의 저자인 그리스 태생의 로마 시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부연 설명이다.

 

‘던져라’와 ‘던져졌다’는 곰곰이 따져보면 담긴 의미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전자는 전형적 능동태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권력의지를 반영한다. 반면에 후자는 영락없는 수동태이다. 마지못해 행동에 나선 소극성과 피동성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카이사르가 수시로 조심스럽게 간이나 보면서 만사에 방어적 태도로 임하는 소심한 성격이었다면 그는 애당초 루비콘강 근처에 아예 얼씬거리지조차 않았을 터이다.

 

‘정치의 사법화’는 지금의 21세기 대한민국만큼이나 공화정 말기의 로마 사회에서도 기승을 부렸다. ‘소 카토’로 불렸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키케로 유형의 변설가형 법률 기술자들이 정계의 중심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백성들의 뜻을 받들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만 할 문제들을 걸핏하면 법정으로 끌고 가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통제 불능의 상태로 극성을 떨친 덕분이었다.

 

정치의 사법화가 양산한 최대 피해자는 몸값 비싼 법률가들을 고용할 경제적 여력이 없는 일반 민중이었다. 그중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퇴역 장병들과 군대를 떠나면 당장 입에 풀칠하기가 막막해지는 현역 병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에 편승해 재판정에서 현란한 말발을 뽐내며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독식하는 이들 법률 기술자형 정치인들은 당대 로마의 평민계급에게 우선적인 증오의 표적이자 일차적 타도 대상으로 당연히 자리매김했다.

 

원로원의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루비콘강을 무단으로 통과한 행위는 형식 논리상으로는 명명백백한 불법 쿠데타였다. 그러나 민중의 압도적 지지와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는 측면에서는 이는 분명 혁명이었다. 루비콘 도강이 오랫동안 혁명적 용단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온 건 카이사르의 대담한 결단이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의 무기력이 악순환을 이루는 지독한 금권정치의 수렁으로 로마를 끊임없이 밀어 넣던 정치의 사법화 추세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배경을 카이사르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무렵의 지중해 일대로부터 수천 년 후의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옮겨보자. 정치의 사법화라는 기준에서 판단하면 2024년의 대한민국은 공화정 말기 로마와 비교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윤석열 정권은 야당에게 투표에서 이길 의지도, 능력도 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혁신당 대표를 검찰이 앞장서서 감옥에 보내주기만 오매불망 기대할 뿐이다.

 

재판에서 한번 이기는 게 선거에서 백번을 이기는 것보다 낫다는 게 윤석열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여당 주요 구성원들의 공통된 생각으로 보인다. 선거의 역할을 부정하고 정치의 존재 이유를 부인하는 이러한 인식은 현 정권의 열혈 지지층에 의해서도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작용은 반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집권세력이 선거에서 백번을 승리하는 것보다 재판에서 한번 승소하는 게 낫다고 믿으니 야당도 정치적 경쟁이 아닌 법적인 다툼에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전직 검사 일색의 집권여당과 현직 변호사 위주의 야당들이 뻔질나게 벌이는 그들만의 지루한 법리 공방에서는 그 어떠한 미래 비전과 역사적 소명의식도 발견되지 않는다. 로마는 그나마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차지한 다음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가속화됐다. 우리나라는 주변 열강의 압력과 협박에 혼자 냉가슴을 끙끙 앓는 분단국가 주제에 감히 정치의 사법화로 치닫고 있으니 더더욱 악성인 경우라 하겠다.

 

필자는 여기에서 잠깐 아주 발칙한 상상을 해보련다. 검사 출신의 집권당 정치인들과 변호사 자격증을 소지한 야당 정치인들 가운데 한 명을 무작위로 선택해 타임머신에 태워 루비콘 강변에 설치된 군막에서 도하 여부를 밤새 고민하는 카이사르의 영혼에 돌연히 빙의시키면 어떠한 결과가 빚어질까?

 

현대 한국의 율사 출신 정치인이 빙의된 카이사르는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신에 폼페이우스와 로마 원로원을 상대로 루비콘강에 대한 소유권 확인 소송을 제기할 게다. 왜냐?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오로지 송사밖에 없는 탓이다.

 

카이사르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머릿수가 나날이 늘어가는 각종 법률 기술자들처럼 고소고발에나 의지해 뭔가를 도모하려는 지질한 인물이었다면 그는 더는 로마제국의 창건자 카이사르가 아닐 것이다. 카이사르는 언제나 창의적이고 선도적으로 결단했고, 자기가 결론을 내린 일들과 관련해서는 절차적 과정 운운하며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영웅은 낮에는 민심과 소통하고, 밤에는 역사와 대화하는 인간이다. 필부는 낮에는 변호사와 상의하고, 밤에는 소장이나 뒤적이는 사람이다. 갓 출범한 22대 국회에는 위대한 영웅적 인간이 다수인가? 비루한 필부들이 주류인가? 그 답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바이다.

 

참다운 정치인이 있어야 마땅할 자리에 기회주의적인 법률 기술자들만 득시글하면 해당 정치체제는 이미 수명을 다한 셈이다. 체제에는 오래전에 시끄럽게 조종이 울렸건만, 루비콘강 기슭에는 카이사르는커녕 개미 한 마리 눈에 띄지를 않는 음산하고 절망적인 현실, 오늘날 한국정치가 직면한 황당하고 총체적인 부조리극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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