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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미드웨이 1942년과 2020년의 평행이론 공희준 편집위원 2020-01-23 18:23:19

반가운 「미드웨이」 흥행 돌풍


현대화 개장을 마친 연합함대 항모 아카기(赤城). 허나 미드웨이 해전에게 허망하게 침몰했다. (사진 : 구글포토)

한국은 6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사를 거의 공부하지 않는 정신적인 비무장 국가다.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군대가 헌법상 금지되어 있음에도 이에 아랑곳없이 전쟁의 역사를 제일 열심히 연구하는 국가들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심리적 측면에서는 변함없이 엄청난 군사강국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전쟁사를 소홀히 대하는 주요한 이유의 하나가 보수세력이 집권하든,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든 “우리는 피해자”라는 유권자들의 약자 콤플렉스를 자극해 정치적 이득을 얻어온 데 있다고 생각한다. 늘 맞고, 당하고, 통곡하는 유약하고 여성적인 모습이 한국인이 상정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자화상이다. 그러므로 전쟁사와 같은 나름 강건하고 남성적인 영역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것이다.


미국의 태평양 함대와 일본제국 연합함대가 각자의 조국의 운명을 걸고서 대결한 미드웨이 해전을 다룬 전쟁영화 「미드웨이」가 우리나라 극장가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점은 따라서 퍽 이례적이다. 우리 대신 미국이 저 교활하고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를 응징하는 장쾌한 대서사시에 한국인이 대리만족을 느낀 것도 적잖은 흥행요소로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필자는 비록 남한사회 일각에서나마 늘 맞고, 당하고, 통곡하는 유약하고 여성적인 한국인의 이미지에 환멸과 염증을 품기 시작한 대단히 긍정적 신호로 영화 「미드웨이」에 쏠리는 대중과 지식인과 충무로 영화계의 관심을 해석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서 전국에 소녀상을 설령 백만 개를 세운다고 한들 일본 자위대 함정에 시쳇말로 ‘기스’ 한 개 낼 수 없는 게 현실세계의, 특히나 국제사회의 냉엄한 작동법칙이다.


전략적 무원칙과 전술적 경직성이 겹치면



미드웨이 해역으로 출동한 항공모함들의 숫자에서 4 대 3의 우위를 점하던 일본이 순식간에 항모 3척(아카기, 가가, 소류)을 상실하고 잔존해 있던 나머지 항모 1척인 히류마저 잃어버린 과정과 원인에 관한 분석과 평가는 교전 당사국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 각지에서 현재까지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필자는 전문적 전쟁사 연구자가 아니다. 세칭 밀덕(밀리터리 매니아)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미드웨이 해전과 관련해 이제껏 접해본 책들과 자료와 영상들을 종합하면 일본군의 패인은 이 한 줄로 명확하게 정리된다.


“목표가 없었다.”


당대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일본해군 기동부대가 미드웨이로 애당초 출동을 감행한 동기는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는 데 있었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200척에 달하는 크고 작은 배들로 구성된 대함대를 편성한 배경이었다. 그 대함대에 미드웨이 섬에 상륙할 육전대가 포함됐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느새 슬그머니 목표가 하나 추가돼 있었다. 혹시 출현할지도 모를 적의 공모(항모의 일본식 명칭)들을 격멸하라는 내용이었다.


목표가 모호해지면 원칙이 흔들린다. 전략이 오락가락한다. 네 척의 항공모함과 이를 따르는 호위함대만으로는 미드웨이 점령과 미국 항공모함 격침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가 없었다. 기동부대의 수장으로서 기함 구실을 담당한 아카기에 승선했던 나구모 주이치는 함재기들에 탑재할 무기를 폭탄에서 어뢰로, 다음에는 어뢰에서 폭탄으로, 또다시 폭탄에서 어뢰로 바꿔 끼는 짓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다가 미 해군 급강하폭격기들의 내습에 아군 항모들이 앉은뱅이 오리 신세가 되어 일거에 궤멸당하는 참상을 속절없이 지켜보고 말았다.


전략적 원칙과 전술적 유연함은 지피지기(知彼知己)와 함께 승리의 양대 전제조건이다. 미드웨이 점령과 적 항모 분쇄 사이에서 우왕좌왕한 일본 해군은 전략적으로 무원칙했다.


더 큰 비극은 그들이 전술적으로는 경직됐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들끼리 격돌하는 함대 항공전의 승패는 어느 쪽이 먼저 상대방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을 사용불능 상태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었다. 상대편 함재기의 이착함을 가로막는 게 승리의 관건인 셈으로,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선빵이 장땡”이었다.


선제공격에 성공하려면 적보다 무조건 먼저 비행기를 항모에서 띄어야 한다. 검은 고양이이건 흰 고양이이건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것처럼, 폭탄을 투하하든 어뢰를 발사하든 적함만 손상시키면 충분했다.


전략에서 무원칙했던 일본군은 전술적으로는 터무니없을 만큼 경직돼 있었다. 그들은 섬은 폭탄으로 공격하고, 선박은 어뢰로 때려야 한다는 교전수칙에 지나치게 충실한 탓에 어뢰와 폭탄을 번갈아 장착하다가 1분 1초가 금쪽같았던 급박한 순간에 헛되이 시간을 낭비했다.


안철수, 일본 기동부대의 실패를 되풀이하다


전략 없는 귀국과 참배만 하면 표가 온다는 틀에 박힌 행보가 안철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사진 김한주 기자)

과거의 전쟁 얘기는 이쯤에서 마치자.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은 현재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최근 언행에서 미드웨이 해전의 일본 기동부대의 행태를 목격하고 있다. 안철수 전 대표가 미드웨이 제도를 향해 돌아올 수 없는 항해에 나선 일본 기동함대와 두 가지 지점에서 너무나 닮은 까닭에서이다.


그는 전략적으로 무원칙하다. 정치인 안철수가 독일에서 귀국한 연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문재인 정권의 폭주를 심판하겠다는 것인지, 국민의당을 부활시켜 다당제를 복원하겠다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안철수 본인의 정치적 생존기반을 일단 구축해놓은 연후에 후일을 기약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종잡기 어렵다.


안철수의 치명적 문제점은 전략적 무원칙에 전술적 경직성까지 더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호남과 진보 성향의 표심을 잡기 위해선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해야 하고, 영남과 보수표를 잃지 않으려면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에 들러야만 한다는 낡고 식상한 정치문법을 아직도 신줏단지처럼 부여잡고 있다.


전략이 무원칙하고, 전술이 경직되어 있어도 살아날 방법이 있기는 하다. 유능한 아랫사람을 골라 믿고 쓰면 된다. 이철재 중앙일보 기자는 야마모토가 나구모에게 조금의 권능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그의 칼럼에 섰다. 야마모토의 삶을 소재로 제작된 일본 영화에서는 야마모토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해군 참모총장 격인 해군 군령부장이 나구모 주이치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지시를 하달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결론은 누가 그의 손발을 묶었는지와 상관없이 나구모 제독에게는 미드웨이에서 그가 대항해 싸웠던 미 해군 제독들이 가졌던 종류와 범위의 권한과 자율성이, 재량과 독자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이었다.


안철수 전 의원이 그를 따르는 정치인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딱 일본 해군 수뇌부가 전투 현장의 지휘관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안철수는 그의 참모 역할을 맡은 인물들에게 재량과 독자성을, 권한과 자율성을 부여한 적이 좀처럼 없다.


김근식 교수, 김철근 위원장, 이태규 의원 등 그의 참모들 혹은 그와 가까운 정치인들이 약간만 독자적이고 자율적 행보를 걷는 것처럼만 보이면 그 즉시 안철수 전 대표는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식으로 냉정히 선을 그어왔다. 한마디로, 내가 예스(Yes)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투였다.


내가 예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조직은, 개인은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1942년의 일본 연함함대와, 2020년의 안철수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통렬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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