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을 ‘김대중 선생’ 또는 ‘김대중 선생님’으로 불렀다. 존경과 사랑이 물씬 묻어나는 호칭이었다. 그를 지지하지 않는 진영은 DJ를 ‘김대중 씨’로 호명했다. 증오와 폄하의 정서가 기본적으로 바닥에 깔린 표현이었다.
나는 그를 김대중 선생과 김대중 씨의 중간지대쯤 되는 ‘김대중 대통령’으로 부르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내가 비교적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무렵은 그가 대통령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와 대략 일치했고, 따라서 필자는 객관적 결과론과 책임윤리의 관점에서 정치인 김대중을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신기 박사와의 대화는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의 국정운영 방식에 관한 논의로 그 무게중심이 차츰차츰 이동해갔다.
공희준 :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을 경선이나 선거에서의 득표 수단 내지 홍보용 도구로만 소환할 뿐이지, 그가 집권 시에 남긴 업적과 실책을 성공적 국가운영을 위한 지표와 나침반으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해왔습니다. 이전 정부들의 공과가 효율적 국정운영을 위한 밑거름 역할을 하려면 기존의 관행과 인식에서 변화와 개선이 요구되는 부분이 뭐라고 보십니까?
이미지만 따오는 건 참다운 계승이 아니다
장신기 : 과거의 국정 경험과 통치 사례는 경선이나 선거에서의 단순하고 일시적인 득표 수단으로만 쓰이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성공적인 국가운영을 위한 디딤돌 차원으로까지 발전적으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이전 정부들과 지금 정부 사이에 정책적 지향점이나 전문가의 인적 구성에서의 연속성이 존재해야 합니다.
공희준 : 그런데 요즘은 조선시대의 사화와 환국의 무한반복처럼 돼가는 분위기입니다. 모조리 독식하다가 와장창 망해서 알거지가 되는 구도가 편만 바꿔가며 악순환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전부 아니면 전무입니다.
장신기 :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 분야에서는 국민의 정부의 햇볕 정책과 참여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의 경우에는 당사에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세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두고 있고요.
YS의 차남인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자유한국당을 향해 부친의 사진을 더 이상 벽에 걸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 김 전 부소장은 최근에는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와의 공식적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YS의 정치적 유산이 어디에서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 현실은 영남 민주화세력으로 알려진 정파가 세 차례(김영삼-노무현-문재인)나 대통령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고 지속가능한 지역적‧계급적 지지기반을 아직껏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저는 자유한국당이 과연 무엇을 계승할 수 있을지 심각한 회의와 의문이 듭니다. 단적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의 낡은 경제발전 모델에 의거해 21세기 최첨단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치열한 경제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임 정부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데에서 핵심은 콘텐츠의 계승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콘텐츠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면밀하게 검증하는 필수적 절차와 과정은 생략한 채, 당장의 지지율 제고를 목적으로 과거의 이미지만 가져다 쓰려고 합니다. 리더십과 정책 기조에서 이전 정부들의 어떤 시책들은 취하고, 어떤 요소들은 버릴지에 대한 진지하고 체계적인 고민은 별로 눈에 띄지를 않습니다.
국민의 정부, 경제를 살려 양심수를 구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노선 중에서 제가 주의 깊게 착목한 부분은 정치와 경제 간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탁월한 정치 지도자인 동시에 안목 높은 경제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장신기 박사는 일반적으로 흔히 간과되어온 김대중 대통령의 상인적 현실감각을 부각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모습이 인터뷰 내내 역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생경제가 충실하고 안정되어야 국정의 민주적 운영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통찰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민주적 개혁을 착실하게 진전시킬 수 있었던 건 국민의 정부가 우리나라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왔던 외환위기 사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의 기본이 경제임을 결코 망각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양심수 문제와 관련해 국민의 정부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양심수 석방을 미적댄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박상천 법무부 장관이 실시한 준법서약서 제도가 또 다른 형태의 사상전향 강요라는 비난에도 시달렸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이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군사법정에서 억울하게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분입니다. 양심수들의 한과 고통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김 대통령이 국가부도를 맞이한 것과 마찬가지인 착잡하고 위중한 경제상황에서 이념 문제에 먼저 매달리는 것 같은 인상을 줬다면 총체적 국가개혁의 동력이 되어줄 폭넓은 민심의 지지와 성원을 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많은 유명 재야인사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겨냥해 정권 교체가 된 일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2000년의 역사적인 6‧15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비전향 장기수들까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 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북한으로의 인도적 송환이 이뤄졌습니다. 성공적인 경제회복에 기초한 근본적인 민주적 개혁조치들이 국민의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취해졌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묘를 알았습니다. 그는 완급을 조절하고, 선후를 헤아리며, 경중을 따지면서 산적한 국정현안을 차분하면서도 과감하게 처리해나갔습니다.
이야기는 애초의 질문과는 관계없이 국민의 정부 시절을 회고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각제 개헌 불발의 영향으로 붕괴됐던 김대중-김종필 공동정부는 2000년 4월의 제16대 총선 직후에 힘들게 복원됐습니다. 그렇지만 2001년 9월에 국회에서 진행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자민련 소속 의원들이 일제히 찬성표를 던지는 바람에 DJP 연합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객관적으로 직면한 당장의 정세와 최종적으로 이룩하려는 장기적 목표, 그리고 목표를 구현하는 수단과 과정 전체를 입체적으로 사고하고 조망하면서 정치를 해왔고, 국정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무리한 도약과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개별 단계에 걸맞은 전략을 신중히 선택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정치적 포석을 조심스럽게 두어가면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그는 개혁가이지 혁명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이와 같은 국정운영의 철학과 방식은 지금의 후배 정치인들도 본받고 계승할 가치가 충분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⑤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