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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원⑧ 입시공부 잘하는 학생들 학부모만 학부모가 아니다 현직 교사가 들려주는 일반인은 알지 못하는 진짜 학교 이야기, 여덟 번째 공희준 편집위원 2019-01-26 17:25:14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다. 학교가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장소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런데 무엇을 공부해야만 하는 질문 앞에서는 합의점을 모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명문대 많이 보내는 학교가 우수한 학교로 평가받는다. 그러므로 입시에 소용되지 않는 공부는 공부가 아닌 것처럼 취급돼왔다. 전대원 선생은 입시공부는 공부가 아니라는 도발적 견해를 피력하며 시대와 정면으로 불화하는 길로 주저 없이 나아갔다.

입시 코디네이터도, 일타강사도 알고 보면 허깨비


전대원 선생은 교양을 교육하는 기관으로서 학교가 가진 존재의 이유를 역설하는 대목에서 시종일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전대원 (이하 전) : (호통 치듯이) 저는 국민들께서 일타강사에 대한 환상을 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공희준 (이하 공) : 저는 일타강사가 누구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전대원 선생은 인터뷰 전반부에서는 입시 코디네이터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후반부에서는 일타강사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깨어날 것을 일반 대중에게 간절히 호소하였다.


전 : 학생운동권 출신 586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거금을 손에 쥐었습니다.


공 : 그 사람들은 큰돈 벌었으면 거기에 만족해야 마땅합니다. 의제설정 한답시고 온갖 사회적 쟁점들에까지 표리부동하고 오지랖 넓게 끼어들지 말고요. 돌아가신 그분 말씀처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전 : 저는 사교육으로 부자 된 586 세대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의 설정 작업에 참여하는 현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현장의 목소리를 두루 경청해야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이 사교육 시장에 관계하면서 축적한 부분적 경험이 마치 전체를 다 아우르는 것처럼 무리하게 일반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좌파들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맛본 핀란드의 교육시스템을 신줏단지 떠받들듯이 떠받드는 일도, 우파들이 미국 일부 지역의 귀족학교가 미국의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교육 모델인 것처럼 호들갑을 떠든 일도, 성적 기준 상위 10프로만을 상대해본 사교육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특수하고 제한된 경험을 확대해석하고 과대포장하는 일도 그 모두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 : 방금 언급해주신 셋을 우리나라 교육과 관련된 ‘일반화의 오류 3종 세트’라 칭해야겠네요.


전 : 맞습니다. 좌파의 핀란드, 우파의 미국, 운동권 출신 586들의 대치동 이 3가지 모두 일반화의 오류에 사용되는 단골소재들일입니다. 제가 많은 분들께 꼭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같은 교육 관계자들이 상위 10프로의 이이들만 쳐다보면 나머지 90퍼센트 학생들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90프로가 상위 11개 대학에 과연 진학할 수가 있냐는 겁니다. 상위 10프로를 준거로 채택하면 나머지 90프로는 갈 데가 없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낙오자라는 낙인을 찍길 바라십니까? 인생의 실패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기를 원하십니까?


공: 교육은 사회의 거울입니다. 저는 사회가 불평등한 이유로 교육이 불평등한 것이지, 교육이 불평등한 까닭에 사회가 불평등한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사회가 교육 불평등의 해소와 시정을 위해 떠맡아야 할 역할과 일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교육이 사회를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성해도, 교육을 위해서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혁신되어야만 한다는 논의는 매우 부실하고 빈약하기 연유에서입니다.


전 : 그러자면 저는 교육의 본질을 먼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필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교육의 본원적 사명과 임무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학생과 학부모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데 놓여야 할까요? 아니면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 시키는 일에 무게중심이 두어져야만 할까요? 저는 공부를 잘 시키는 데 교육의 가치와 역할이 당연히 자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 : 상당히 애매한 말씀이네요. 스마트폰이 전화기와 컴퓨터가 일체화된 물건인 것처럼, 대한민국에서는 공부와 입시가 샴쌍둥이처럼 찰싹 붙어있는 탓입니다. 섣불리 분리수술에 나섰다가는 쌍둥이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할지 다들 속으로만 끙끙 앓는 형국입니다.


전 : 그렇다고 마냥 놔둔다고 해서 건강을 보장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힘들더라도 입시와 공부를 서로 떨어뜨려놓는 노력이 요구되는 까닭입니다. 그 노력은 혼자 혹은 몇몇만의 노력이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정부 단독의 노력만으로도 목표 달성에 턱없이 미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리 모두가 노력을 기울이는 데 합심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다함께!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 원하는 입시의 모든 것은 메가스터디와 같은 유명 사교육 기관 안에 모두 갖춰져 있다. 그럼에도 어떤 부모도 학원에 보내기 위해 자식을 학교에서 자퇴시키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표리부동함을 보여주는 단면인 셈이다. (관련 이미지 : 메가스터디 누리집 대문화면)

위선이라고 욕먹을지언정 교양을 가르치자


공 : 입시와 공부를 분리시키는 노력에 우리가 어떠한 경로와 형식으로 힘을 보탤 수가 있을까요?


전 : 가까운 사례로 제가 현재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를 거론해보겠습니다. 이 아파트만 해도 단지 바로 옆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3 수험생들이 요번 대학입시에서 거둔 성과가 적힌 큼지막한 플래카드를 입주민들이 요란하게 내걸고 있습니다.


공 : 그걸 그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당장 금지시켜야 합니다.


전 : 하지만 금지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공 : 저 같으면 그런 요망한 현수막들 시원하고 정의롭게 찢어버립니다.


전 : 공공장소에 게시한 현수막이면 구청에 민원을 넣어 치워버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의 사유지에 설치한 광고물을 타인들이 무슨 권한으로 훼손하거나 철거합니까? 더욱이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아파트의 입주민들이 자기 아이들이 재학 중인 학교가 입시에서 호성적을 거뒀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어떤 의도로 달아놓았겠습니까?


공 : 두말할 나위조차 없이 자기네들 집값 오르라는 속내에서 게첩한 거겠죠.


전 : 물론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교육 문제는 모두가 다 같이 노력해야 비로소 풀 수 있는 숙제입니다. 우리는 위선을 혐오합니다. 원로님께선 위선과 교양의 차이가 뭐라고 보시나요?


공 : 난해한 질문입니다.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선생님께서 정답도 아울러 말씀해주세요. (웃음)


전 : 위선은 자기를 위해서 선(善)을 가장하는 짓입니다. 교양은 남들을 위해서 선량한 척하는 일입니다.


공 : 동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사실은 저를 위해서 제가 자발적으로 줍고 다닙니다. 왜냐? 내가 보기에 미관과 위생상 좋지 않거든요.


전 : 그러한 행동은 위선이 아닌 교양입니다. 원로님이 남들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만 쓰레기를 치우시는 건 아니잖아요?


공 : 그건 맞습니다.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가 남이 보기에 나쁜 게 아니라, 제가 보이게 나쁘니까요.


전 : 그러면 남들, 특히 유권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만 길거리를 청소하는 정치인들의 행동은 어디에 포함되겠습니까?


공 : 그야 당연히 위선이죠. 조금 미화해 표현하자면 사회생활 영악하게 잘하는 것이고요.


전 : 그렇습니다. 위선입니다. (잠시 멈췄다가) 제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면 제가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공 : 물론 기뻐하시겠죠.


전 : 그렇죠. 제 아이가 서울대 들어간 사실에 제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왜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제가 제 아들이 서울대 갔다고 대형 현수막까지 붙여가며 동네방데 떠들고 다니면 이웃주민들이 저를 어떤 눈초리로 쳐다볼까요?


공 : 현직 교사 신분인 전대원 선생님께서 만약에 그런 일을 벌이신다면 백세인생 자동예약입니다. 욕을 차떼기로 얻어먹는 덕분에 오래오래 장수하실 테니까요. (웃음)


전 : 욕먹어도 싼 노릇입니다. 따라서 플래카드 따위는 밖에다 내다붙이지 않는 게 민주시민의 상식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 입시 결과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설령 굴뚝같아도 플래카드를 붙이지 않으면 위선이겠습니까, 교양이겠습니까?


공 : 이론의 여지없이 교양입니다.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덕목일 절제력과 자제심이기도 하고요.


전 : 저는 우리 사회가 그와 같은 교양을, 절제력과 자제심을 키워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도 교양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인물을 주변인들이 위선자라고 비난합니다. 저는 위선을 가르친다는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학교는 학생들에게 교양을 교육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양을 가르치는 학교를 향해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위선만 교육한다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이는 달은 보지 않은 채 손가락만 바라보는 것처럼 근시안적 단견일 수 있습니다.


공 :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80년대 초에 「고교생 일기」라는 드라마를 KBS 한국방송에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대치 역할로 출연한 중견 배우 최재성 씨가 풋풋한 데뷔 시절에 나왔던 청소년용 연속극이었습니다. 제가 딱 한 장면이 뇌리에 강렬히 남았습니다. 방송반 학생들이 하루는 선생님에게 앞으로는 학내 방송국에서 팝송이나 가요도 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단박에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학교가 아니면 어디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겠느냐?”고 반문하면서요. 그래서 제가 과거에 회사에 다닐 무렵에 후배 직원들에게 매일 오후 5시마다 FM 라디오의 국악방송을 20분 동안 들려주었습니다. 그거 아니면 젊은 신세대 직장인들이 또 어는 곳에서 국악을 감상할 기회를 얻겠습니까? 저는 학교에서건, 회사에서건 점심밥을 원래부터 언제나 혼자 먹어온 까닭에 왕따당하는 게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웃음)


전 : 회사에서 그러시면 곤란하죠. (웃음) 하지만 학교에서는 위선을 학습시킨다고 욕먹을 걸 무릅쓰고 학생들에게 교양을 체득시켜줄 필요성이 약간은 있습니다. 참다운 의미의 학생 중심의 교육은 학생이 진짜로 원하는 거에 맞춰, 학생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에 착안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뜻합니다. 학생들의 그때그때의 즉자적 바람에 호응해주는 게 아닙니다.


공 : 지금은 학생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예전 운동권 선배들 말투를 빌리면 학생 추수의 교육의 됐습니다. 학생들 비위 맞춰주기기에 급급해하는 교육이요.


전 : 학교는 학부모의 의견을 반영하고 수렴하는 곳이, 학부모들의 일반의지(General Will)를 고려하고 감안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 일류대학 합격시키는 교육에만 매진하라는 학부모들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고분고분 순응하는 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생도 다양하지만, 학부모 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엄마아빠들만을 학부모의 범주에 넣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사는 전반적인 학부모들의 전반적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학교 운영과 학생 지도의 굳건한 중심을 잡아나가야 합니다. 학교는 그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하는 기관입니다. 문제는 이 당연한 명제들이 입시와 맞물리기만 하면 전연 먹히지도 않고, 힘을 쓰지도 못한다는 점입니다. (⑨편에서 계속됨…)



덧붙이는 글

일반 의지는 프랑스의 근대 계몽철학이자 교육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1712년~1778년)가 「사회계약론」에서 제창한 개념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유되는 의지를 가리킨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서 갈무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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