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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는 어떻게 꼰대가 되어갔나 공희준 편집위원 2020-04-27 16:39:36

홍준표의 ‘압축적 꼰대화’는 서울 강북에서 고향 영남으로 돌아가며 급격히 이뤄지고 말았다. (사진출처 홍준표 페이스북)홍준표는 이재명의 미래였다


“칭기즈칸에게 열정이 없었으면 그는 한낱 양치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참여정부 중반기에 시중의 어느 저축은행이 내보냈던 홍보용 광고의 문구다. 21세기 들어와 평균적 한국인의 심리적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은 편집증적인 안정희구 성향을 드러내놓고 저격한 이 광고문구가 장안의 화제가 된 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었다.

 

참여정부 중반기는 정치인 홍준표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는 당대표도 아니었고, 광역자치단체장도 아니었다. 대신에 홍준표는 그 이상의 위치를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여의도 정치권의 만만찮은 다크호스였다. 정치인의 진정한 전성기는 정상 자체에 올랐을 때가 아니다. 정상으로 연결되는 오르막길을 타는 시기이다.

 

당대표도 아니고 광역자치단체장도 아닌 홍준표가 전성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가 서울 동북부 16개 선거구를 통틀어 유일하게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보수정당 소속의 정치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홍준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합작해 국회에서 무리하게 밀어붙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을 뚫고서 생존하는, 그야말로 바퀴벌레보다 더 질긴 경이로운 생명력을 과시하며 살아남았다. ‘바퀴벌레’는 홍준표가 당내의 반대파들을 거칠게 비난할 적마다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용어이기도 하다.


2004년의 1차 4․15 총선에서 생존한 홍준표는 칭기즈칸 부럽지 않은 열정이 있었다. 홍준표는 국적법을 개정해 검은머리 외국인들이 편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길을 원천봉쇄했다. 원조 파퓰리스트 홍준표의 맹활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무늬만 외국인인 사실상의 한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각급 학교들에 손쉽게 편입학해온 그릇된 관행에 강력하게 철퇴를 내리고자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홍준표의 미래가 이재명이었다면, 이재명의 선구자는 홍준표였다.


홍준표가 서민대중이 가려움증을 느끼는 곳들을 시원시원하게 긁어준 데에는 그의 독특한 지역구 사정이 톡톡히 작용했다. 서민층 주거지역인 서울 동대문에서 정치를 하고 선거를 나가야만 하는 홍준표 입장에서는 힘없고 가난한 일반 유권자들과 코드를 맞추는 서민적 감수성을 한시도 잃지 말아야만 했다. 서민적 감수성이 홍준표를 열정적 정치인으로 변모시켰고, 그렇게 생겨난 열정이 홍준표의 서민적 감수성을 더욱더 키우는 선순환 구조가 전성기 시절의 홍준표 주위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열정의 강북 정치인에서 빈정거리는 영남 정치인으로

 

2012년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홍준표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선거는 병가지상사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핵심은 선거 다음의 거취와 행보에 달렸다.

 

홍준표는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했던 서울 강북을 떠나 고향인 경남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인생 2모작을 시작한다. 2모작인지라 1모작 때의 열정과 감동이, 기대감과 신선함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귀향을 계기로 홍준표는 급격히 보수화된다. 최근에 그의 상징처럼 돼버린 완고한 꼰대 이미지도 그가 경상도에서 정치를 하며 얻은 후유증이자 부산물이다.

 

그가 즐겨 쓰는 표현 방식을 또다시 빌리자면 영남 정치인 홍준표의 얼굴에서는 심술궂은 영감탱이의 표정만이 거의 시종일관 읽힌다. 홍준표가 표정 관리에 지극히 서투른 인물임을 감안하면 홍준표의 평상시 생각과 인식 역시 앞뒤 꽉 막힌 영남권 노년세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올해의 2차 4․15 총선의 참패를 책임지겠다며 며칠 전 당수직을 사퇴한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수도권 험지 출마를 종용하면서 홍준표에게 당의 공천을 주지 않았다. 제1야당의 공천에서 배제된 홍준표는 황교안의 행위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고 극렬하게 반발하며 고향인 영남에서의 입후보를 강행해 8년 만에 국회의원 배지를 가슴에 다시금 달게 되었다.

 

필자는 충청도에서 태어나 서울 강북 지역에서 성장해 현재는 홍준표의 옛 선거구들 가운데 하나인 잠실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배경과 정체성을 갖고 있는 필자에게 홍준표의 대구에서의 당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누가 만약 물어본다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관심 없습니다.”

 

그렇다. 수도권이, 범위를 좁히면 서울이 정권창출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이 시대에 홍준표가 대구에서 국회의원에 선출됐다는 소식은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견적을 내보자면 저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의 어떤 작고 구석진 나라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사건만큼이나 의미도 없고, 영향력도 없다. 가수 이승기의 노래 제목을 차용해 촌평한다면 한마디로 “그래서 어쩌라고?”이다.

 

서울 정치인 홍준표는 서민들의 열정에 충만한 벗이었다. 영남에서 정치인생 2모작에 나선 경상도 정치인 홍준표는 빈정거림만 가득한 냉소적 꼰대일 따름이다. 서울 강북에서 정치를 할 때의 홍준표는 강남부자들을 겨냥해 연신 묵직한 돌직구를 날렸다. 영남에서 도지사를 연임하고 국회의원 자리를 되찾은 홍준표는 시대착오적인 수구냉전 세력들을 향해 살랑살랑 알랑방귀를 뀔 뿐이다.


열정이 있는 위대한 정치인은 편하고 안전한 안방을 과감히 벗어나 뉴프런티어 개척에 도전적이고 모험적으로 앞장선다. 칭기즈칸은 익숙한 고향 마을을 주저 없이 버린 덕분에 칭기즈칸이 될 수 있었고, 나폴레옹은 출신지인 코르시카 섬을 시원하게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될 수가 있었다.

 

홍준표는 한강 남쪽에서도 금배지를 달았고, 한강 북쪽에서도 금배지를 달았고, 낙동강 유역에서도 금배지를 달았다. 낙동강 언저리에서 지질하게 금배지를 달면서 홍준표는 수필가 피천득이 「인연」이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얘기한 백합같이 스멀스멀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쇠락의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국민들을 위해서도, 보수정당을 위해서도, 그리고 본인인 홍준표 자신을 위해서도 세 번째 동네에서의 금배지는 아니 달았어야 좋았을 것이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라앉으면 필자는 가족을 데리고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늦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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