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신기⑥ “김대중의 카리스마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속한 계파가 있다면 저는 그건 다름 아닌 실력파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산가도 아니고, 명문가의 자손도 아니었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국민이 희망과 믿음을 가진 건 DJ에게는 발군의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력에 헌신과 선명성이 가미되니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무후무할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2019-10-22 공희준
- 장신기⑤ “김대중에게 정치는 곧 국민을 살리는 일”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서 1982년 12월에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는 이듬해인 1983년 9월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정식으로 첫발을 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3년에 일본에서 1차 망명생활을 할 즈음에 하버드 대학의 연구원으로 이미 위촉됐었습니다.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생활 등 파란만장한 삶을 차례로 거치며 하버드행이 오랫동안 미뤄져 왔었습니다 2019-10-21 공희준
- 장신기④ “김대중의 정치는 경제가 기본이 되는 정치” 공희준 :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을 경선이나 선거에서의 득표 수단 내지 홍보용 도구로만 소환할 뿐이지, 그가 집권 시에 남긴 업적과 실책을 성공적 국가운영을 위한 지표와 나침반으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해왔습니다. 이전 정부들의 공과가 효율적 국정운영을 위한 밑거름 역할을 하려면 기존의 제도와 인식에서 변화와 개선이 요구되... 2019-10-18 공희준
- 장신기③ “김대중-김종필 연합은 역사의 명장면” 김대중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 관해 한 얘기들 가운데 제일 유명한 일화가 1979년 5월에 개최된 신민당 총재 선출 전당대회를 며칠 앞두고 아서원에서 한 김영삼 지지 연설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옥선 파동으로 말미암아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난 다음 권토중래를 도모하던 중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철승 대표 최고위원의 당권파가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에 소극적인 경향을 드러내자 김영삼 대통령을 신민당 총재로 밀기로 결심했습니다 2019-10-17 공희준
- 장신기② 김대중 대통령은 ‘중도 민족주의자’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동족상잔의 비참한 6․25 전쟁 당시에 좌익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으로 취급되는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습니다. 저는 분단과 전쟁을 차례로 경험한 쓰라린 기억이 김대중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중도 민족주의로 정리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10-16 공희준
- 장신기① 「김대중 전집」의 완성은 기적이었다 저를 특히 놀라게 한 자료는 1950년대에 생산된 콘텐츠였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폐간된 여러 매체들에 김대중 대통령이 기고했던 기명 칼럼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50년대까지는 이름난 유명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에 본인이 시사평론가 자격으로 직접 쓴 글들이 상당수 현존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실린 자신의 글을 하나하나 스크랩해 갈무리했습니다 2019-10-15 공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