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메이커가 스타로 탄생한 그 날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와 방시혁 하이브 엔터테인먼트 회장의 「민방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는 한국 사회의 평범한 중장년 남성들이 뉴진스의 존재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해 만들어진 일인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고인이 된 배우 추송웅 선생이 생전에 이 연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해 신들린 연기력을 보여준 바 있었다.
유튜브로 생중계된 민희진의 장장 두 시간이 넘는 단독 기자회견은 마치 추송웅이 성별과 직업만 바꿔 환생한 듯했다. 민 전 대표는 회견장을 빼곡히 메운 취재 기자들은 물론, 유튜브 중계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한 수십만 누리꾼들까지 자유자재로 들었다 놨다 하는 신기에 가까운 발군의 카리스마적인 무대(?) 장악력을 선보였다. 민희진이 화장기 없는 민얼굴과 동네 편의점에 라면 사러 가는 것 같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등장한 문제의 기자회견은 민희진 이름 석 자를 일반 대중에게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 죽기 살기로 총수에게 덤벼드는 반항적인 계열사 사장을 돈과 법과 인맥의 힘으로 조용히 제거·숙청하려 의도했을 방시혁에게는 본격적인 악몽의 시작이었다. 민희진이 단숨에 너무나 커버린 탓이었다.
민희진과 방시혁의 대립과 갈등은 뉴진스에 대한 연고권을 둘러싸고 빚어졌다. 나는 민희진의 기념비적 기자회견을 보고 난 다음에야 뉴진스 멤버들이 누구누구인지를 포털사이트에서 비로소 황급히 검색했다. 네이버에 소개된 순서대로 한 명씩 차례로 거명해보련다. 민지, 하니, 다니엘, 해린, 혜인, 이렇게 다섯 명이더라.
이들 가운데 본명이 하니 팜(Hanni Pham)인 하니가 베트남계 호주인이라는 사실도 이참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덕분에 하니가 동해 너머 일본 도쿄돔에서 개최된 뉴진스의 팬미팅 행사에서 영원한 아이돌로 칭송받는 마츠다 세이코 여사의 불후의 히트곡 「푸른 산호초」를 상큼하게 노래하는 장면도 생생한 유튜브 동영상으로 덩달아 구경할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구태 기성세대는 베트남보다는 월남이 더 귀에 감기는 연령대의 집단이다. 이를테면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열창한 노래의 곡명은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아니라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였다.
내 아버지 세대 중에는 월남전에 참전한 이들이 여럿이었다. 우리 집에서 ‘S 대위’로 통하던 아버지의 친구분도 월남전 파병 용사였다. 아버지와는 소싯적부터 절친한 고향 친구 사이였던 S 대위는 무척이나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월남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 가족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이제는 아버지도, S 대위도 돌아가신 지 오래임은 물론이다.
남국(南國)의 하니가 남도(南道)에 갔던 날
얘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바다의 산호초는 육지의 야자수와 더불어 남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민희진이 월남 혈통인 하니로 하여금 「푸른 산호초」를 부르도록 한 선택은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런데 적도 남쪽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던 월남인의 후예가 월남전의 주요한 교전국이었던 한국으로 건너와 가수로 데뷔해 일본에서 공연을 한 일은 식민지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전쟁의 비극적 상처로 점철된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사람의 마음을 꽤 착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사건이었다. 한국과 월남과 일본은 전쟁과 식민으로 복잡하고 심란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니는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한국 땅에서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겪은 몇 가지 일화들을 털어놨다. 그중에는 서툰 한국어로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와 대화하는 도중 자신을 조선대에 다니는 유학생으로 둘러댔던 사연도 있었다.
왜 그 숱한 대학들 중에서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조선대학교였을까? 하니는 그곳에서 열린 대학 축제에 공연하러 갔던 일이 때마침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필자의 순전히 일방적인 어림짐작으로는 아마 조선대에서 유난히 우렁찬 환호성과 우레 같은 박수갈채 소리를 받았던 인상적 추억이 하니의 잠재의식 속에 깊숙이 침잠해 있다가 얼떨결에 튀어나온 게 아니었을까?
광주는 한국 현대사에서 미안함과 애잔함을 동시에 자아내는 도시이다. 그러한 미안함과 애잔함은 소설가 한강이 광주 민중항쟁을 소재로 집필한 장편소설인 「소년이 온다」로 한국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다시금 또렷이 환기되었다. 한강이 상기시킨 미안함과 애잔함의 감정은 제2의 전두환 신군부를 꿈꾸며 윤석열 도당이 획책한 ‘12·3 내란 사태’를 시민들의 일치된 힘으로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무려 900여 차례에 달하는 외침을 받은 수난과 시련의 과거사를 대내외적으로 수시로 강조하는 국가이다. ‘피해자 심리’는 평균적인 한국인의 정서 저변에 기본값으로 깔린 마음이다. 이러한 한국인들에게 월남은 미안함과 애잔함을 한꺼번에 자아내는 드물디드문 나라이다. 피해자의 나라 한국이 월남을 향해서만은 그 어떠한 변명의 여지 없이 모질고 잔인한 가해자의 나라로 자리매김해온 탓이다.
「전투감각」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서경석 장군이 지은 책이다. 책의 제일 뒤표지에 짙은 글씨체로 인쇄된 문구를 그대로 인용한다면 ‘파월 맹호부대 소대장, 중대장으로서 치열한 전투를 경험한 전사의 기록’이다.
적군에게 패배한 군대는 물리적으로 붕괴한다. 민간인과 싸웠던 군대는 정신적으로 와해된다. 물리적으로 붕괴된 군대와 정신적으로 와해한 군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력한 복원력을 가지고 신속히 재건될 수 있는지는 물어보나 마나이리라. 당연히 전자일 테다.
1980년 봄의 광주에서 중무장한 병력을 동원해 민간인을 학살한 전두환과, 2024년 초겨울의 서울에서 신성한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최정예 특수부대들을 앞세워 침탈한 윤석열은 국민의 군대이자 호국의 간성이어야만 할 국군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와해시켰다는 점에서 만고불변의 역적이자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일 터이다.
이전에 한국과는 그 어떤 억하심정과 은원관계도 없었을 이역만리 월남에서 펼쳐진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든 우리나라 군인들은 적병과는 물론이고 민간인들과도 싸워야만 했다. 「전투감각」에는 그 비극과 악몽의 편린이 침통한 어조로 회고·서술돼 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을 살아갔을 뉴진스 하니의 동포들에게 한국군의 돌연한 출현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 지상을 무섭게 엄습한 끔찍한 재앙과 진배없었다. (③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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