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원칙 있는 패배의 길을 가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경기도 화성 을 선거구 출마를 선언했다. 화성 을 선거구는 최근 몇 년간 소위 핫플레이스(Hot Place)로 떠오른 동탄 신도시가 자리해 있는 곳이다.
이준석 대표의 화성 을 선거구 출마 발표를 계기로 개혁신당은 새로 생길 예정인 화성 정 지역구에서 총선에 나오는 이원욱 의원, 용인 갑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양향자 원내대표 세 사람이 삼각편대를 이루어 경기 남부의 반도체 벨트에 일제히 출격해 공동으로 득표율을 제고하는 나름의 전략적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준석 대표의 지역구 출마는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결정이다.
지역구 선정이 늦어지면서 이준석은 그와는 살벌한 천적관계에 놓여 있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때문에 생겨난 간보기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안철수는 결정장애로 종종 오해받을 정도의 과도한 탐색전과 지나친 몸조심으로 간을 본다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간보기’는 ‘친일’과 ‘종북’ 못잖게 정치인의 평판과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악재로 작용하게 되었다.
지역구로 나갈 것인지 비례대표로 출마할 건지에 대한 결심이 늦어지고, 지역구로 나간다면 어느 동네에서 출사표를 던질 것인지에 관한 최종적 결정이 지연되면서 이준석 대표는 간을 본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주었다. 이는 개혁신당의 지지율과 이준석의 이미지를 아울러 적잖이 추락시키는 구실을 했다. 나는 이준석이 국민의힘을 탈당함과 동시에 일찌감치, 혹은 늦어도 개혁신당을 창당하는 시점에 출마할 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면 지금보다는 유리한 환경에서 선거전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비록 강남권은 아닐지언정 이준석이 자신은 살고 당은 망하는 최악의 결정만은 피했다는 점이다.
최고의 리더는 나도 살리고 조직도 살리는 사람이다. 최악의 지도자는 본인은 살고 조직은 몰락시키는 인간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요 며칠 동안 급격히 난조에 빠져든 이유는 이재명 대표가 자기는 살고 당은 망하게 하는 인물로 여론의 시선에 비친 탓이다. 이준석은 이재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선택을 했다.
제22대 총선 정국은 이준석에게 성공이 목표가 아닌 생존이 목적인 무대로 애당초 기본값이 설정되었다. 우리나라 정치는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방어적 지역주의가 서로 맞물려 작동하면서 상당수 유권자들이 막대기를 꽂아놔도 찍어주는 맹목적인, 아니 맹종하는 투표 행태에 깊숙이 중독된 상태다. 거대 양당 이외의 정치세력에게는 앞으로 가면 죽음의 계곡이요, 뒤로 가면 천길 낭떠러지인 대한민국 제도권 정치의 저주받고 파행적인 비정상적 구조에서 작금의 이준석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는 장렬한 산화이고, 명분 있는 패배이다.
이준석은 개혁신당 후보자들에게는 어디를 가도 험지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모든 곳이 험지임에도 과감하게 지역구 출마에 나선 이준석의 의연하고 결단력 있는 태도가 장예찬 국민의힘 청년 최고위원이나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상근 부대변인 유형의 이른바 잘디잘은 젊은 구태들과는 달라도 완전히 다른 거물급 대형 정치인으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를 장기적으로 착실하게 성장시켜줄 것으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확신하는 터이다.
한동훈, 공세종말점에 다다르다
이준석이 바닥을 친 것과 거의 똑같은 시기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점을 찍었다. 전쟁에서 흔히 운위되는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셈이다.
공세종말점은 더 이상 진격하기에 힘이 달리기 시작하는 한계지점을 가리킨다.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나라 양제의 별동대는 평양성 바깥 30리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38선을 넘어 기습적으로 남침을 개시한 북한 인민군은 낙동강에서 각각 공세종말점과 마주했다. 이재명의 더불어민주당은 2023년 10월에 실시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공세종말점과 맞닥뜨렸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이끄는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 공천에서 배제된 김영주 현 국회부의장을 영입한 데서 공세종말점에 당도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 부의장의 당적 변경은 자중지란으로 지리멸렬하던 분위기의 더불어민주당에 경각심을 아연 불어넣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민주당 탈당을 돌연히 포기한 게 친문집단과 친명진영이 단지 심야에 모종의 타협에 긴급하게 이르렀기 때문만일까? 자당 소속의 국회 의장마저 당을 이탈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두 집단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자연스럽게 공유했을 성싶다.
전쟁에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르면 보급이 불량해진다. 이를테면 탄약과 연료가 원활히 공급되지 않고, 손실된 병력이 적시에 보충되지 않는다.
정치 특히 선거에서 공세종말점에 닿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무리한 외연확장을 시도한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에게 느닷없이 선거연합을 제의했던 사례가 뚜렷한 일례다. 사람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뜬금없고 생뚱맞은 ‘조명연합’ 발상이었다.
김영주 부의장 영입과 관련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친정권 성향의 보수일간지들까지 나란히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이해와 요구를 앞장서서 대변해온 야당의 중진 정치인이 갑자기 파란 잠바를 빨간 잠바로 갈아입고서 민주당을 요란하게 탄핵하니 이들 보수언론으로서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치인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또 다른 징후는 워딩, 즉 말이 터무니없이 오만불손해진다는 데 있다. 이준석 대표가 한동훈 위원장에게 총선 불출마 방침을 번복하고 동탄 신도시에서 자웅을 겨루자고 요구하자 한 위원장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투로 이준석의 이야기를 싸늘하게 간단히 일축했다.
필자가 만약 한동훈에게 선거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자의 입장이었다면 다음과 같이 응대하라고 진중하게 조언했으리라.
“이준석 대표는 윤석열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입니다. 그런 이준석이 성급하게 당을 뛰쳐나가 고생하는 모습에 제 가슴이 정말 너무 아픕니다. 이 대표가 하루빨리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한동훈은 이러한 겸손한 자세의 발언을 하지 않으려 할 게다. 정치인생의 정점을 찍고 있는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시쳇말로 졸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아군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계속 픽픽 쓰러지는 형편에서도 히틀러는 스탈린과 소련군을 여전히 깔보고 무시했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간직되어온 고대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가차 없는 응징에 그 뿌리를 두었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신의 뜻이 아니라 민심이 오만한 권력자를 단호히 심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은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자진 유폐를 낳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오만은 공천 파동으로 한국의 제1야당이 심리적으로 분당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오만은 어떤 놀랍고 충격적인 후과를 빚어낼까? 정치의 세계만큼 천장과 바닥 사이의 간격이 좁은 곳도 드물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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