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임금님 기억력은 금붕어 기억력!”
지금이 만약 봉건왕조가 나라를 지배하는 시대였다면 세간에는 위와 같은 조롱 섞은 빈정거림이 백성들의 입을 타고서 암암리에 널리 퍼져나갔을지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걸어간 잘못된 실패한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말기에 특별사면을 받아 현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새로 지어진 사저에서 거주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2021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이 최종 확정된 터였다. 그에게 선고된 20년의 징역형 가운데 2년은 2016년 4월 치러진 제20대 총선 국면에서 당시의 집권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공천 과정에 개입한 행동이 발단이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특정인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공천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뚜렷한 물증은 없었다. 녹취록은 물론이고 녹음파일도 당연히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진박감별사를 자처하는 측근들을 총동원해 김무성과 유승민을 비롯한 당내의 비주류와 반대파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는 여러 가지 주변 정황들이 박근혜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이 내려지도록 이끄는 결정적 근거와 계기들로 작용했다.
헌법에 보장된 정당의 민주성과 자율성을 무너뜨렸다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기소해 결국에는 감옥까지 보낸 일을 주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박영수 특검팀의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검사 윤석열은 오랫동안 관행으로 묵인돼온 현직 대통령의 여당에 대한 당무개입 행위를 실정법 위반으로 칼같이 단죄했다. 대통령이 원활하고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명분으로 본인과 가까운 인사들을 낙하산 공천으로 내리꽂아 국회의원에 당선시켜온 한국정치의 해묵은 악습에 윤석열은 불법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게끔 찍어버린 셈이었다.
검사 윤석열이 현직 대통령이 여당의 당무에 다시는 개입하지 못하게끔 오죽 단단하게 대못을 박아놨으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임 시기에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것조차 한사코 조심했겠는가? 심지어 문 전 대통령은 청와대가 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진표가 이해찬에게 당대표 경선에서 패배하는 광경을 사실상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필자가 방금 소개한 일련의 사태는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아니다. 국민의 기억에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는 최근의 사건들이다. 더욱이 사건의 중심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현 법무부 장관으로 대변되는 서초동 검찰권력이 주요한 행위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을 위시한 현 정권의 권력 실세들을 몇 년 후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뜨릴 게 분명한 불법과 범법의 씨앗은 윤 대통령이 심복들을 앞세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당대표직에서 무리하게 쫓아냈을 때 이미 풍성히 뿌려진 상태다. 윤 대통령이 권성동에게 발송한 텔리그램 문자메시지는 대통령이 여당의 당무에 노골적으로 관여해왔음을 증명하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물증으로 분류될 수가 있다. 시쳇말로, 빼도 박도 못할 증거인 셈이다.
더욱이 박근혜는 김무성과 유승민 세력을 찍어내면서 “진실한 사람만이 선택받아야 한다”는 알쏭달쏭한 발언을 발설했을 뿐이다. 반면에 윤석열은 이준석을 겨냥해서는 내부총질이나 일삼는 당대표로 직접적으로 저격했다. 안철수에 관해선 ‘국정운영의 적’으로 대통령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명확하게 규정했다. 박근혜의 당무개입은 흐릿하고 형태 없는 심증 차원에 머물렀지만, 윤석열의 당무개입은 반박 불가능한 가시적 물증들로 속속 박제돼왔다.
박근혜의 공천개입에 총대를 멘 인물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였다. 그런데 저 악명 높은 진박감별 소동의 주역 최경환도 이진복 현 용산 대통령실 정무수석 비서관과는 달리 집권당 최고위원을 만나 어떻게 처신해야만 공천에 유리할지를 협박조로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지난 3월 8일 실시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된 태영호 의원이 의원회관의 보좌진과 나눈 대화에 따르면 이진복 수석은 보수의 아성인 강남에서 또다시 지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고 싶으면 윤 대통령의 굴욕적인 대일외교 행보를 무조건 옹호하라고 태영호를 강하게 압박했다고 한다.
태 의원의 이러한 고백 아닌 고백은 듣기 평가가 불필요할 정도의 또박또박한 말투로 녹음돼 어제 MBC 문화방송 뉴스를 타고서 전국적으로 공개되었다. 이진복 수석과 태영호 의원이 황급히 내놓은 해명은 태영호 혼자 없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지어냈다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진복은 요번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유력 대선주자이자 윤 대통령과는 후보 단일화의 동반자였던 안철수 의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직폭력배를 소재로 한 범죄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무시무시한 경고성 충고를 내뱉었다.
윤석열의 말이기도 했을 이진복의 이 말은 한창 활발하게 당대표 선거운동을 펼치던 안철수를 그 즉시 투명인간으로, 냉동인간으로, 잉여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 전당대회가 끝난 지 두 달 가까이 경과했음에도 안철수는 파급력 높은 민감한 정치 현안에 관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겁을 먹어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이다. 안철수를 한방에 굴복시킨 이진복 입장에서 태영호를 제압하는 건 그야말로 어린애 팔 비틀기였으리라.
필자는 위대한 서양 철학자 헤겔이 창안한 개념인 ‘역사의 간지’가 이 대목에서 문득 생각났다. 태영호가 이진복과 밀담한 내용을 어떠한 동기와 의도로 보좌진들에게 시시콜콜히 설명했는지, 그리고 태영호 의원의 사무실 안에서 도대체 무슨 사연과 곡절이 있었기에 비서들 중 한 명이 ‘영감’의 푸념 가득한 하소연을 감히 녹음할 작정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확실한 부분은 “하늘의 그물은 성기기는 해도 빠뜨리지는 않는다”는 노자의 통찰력 넘치는 명제가 윤석열 정권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될 것이란 점이다.
민중에게 최선의 상황은 권력자가 아예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차선의 상황은 죄를 지은 권력자가 나중에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최선의 경우는 아닐지언정 차선의 경우는 맞이할 수 있도록 해준 태영호 의원의 건투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그가 탈북을 결행할 무렵의 용기와 소신을 되찾아 윤석열 일행의 무도한 행태와 폭력적 전횡에 이제부터라도 당당히 맞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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