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정의기억연대와의 싸움에서 완승해
공희준(이하 공) : 미디어워치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끌어온 「정의기억연대」와도 한바탕 갈등이 있지 않았나요?
황의원(이하 황) : 윤미향 의원의 배우자인 김삼석 수원시민신문 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배우자뿐만이 아닙니다. 윤 의원의 시누이, 즉 남편의 여동생 역시 국보법 위반 혐의로 처벌당했습니다. 여동생의 남편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고요.
제가 종북 문제를 오랫동안 심층적으로 천착해왔지만 이런 집안은 유례가 없었습니다.
윤미향 의원의 배우자와 시누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황 대표는 이들을 향해 더욱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지만 나는 이와 연관된 대화는 생략하기로 했다. 황의원과 달리 필자는 소송에 단련된 몸이 아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 : 가족 구성원 전체가 북한에 우호적 성향인 가정은 여럿 있습니다.
황 : 집안 식구들이 국가보안법을 단체로 어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더욱이 가족들이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과도 엮여 있어요. 저희가 그들과 소송을 벌여 주요한 쟁점들에서 완승을 거뒀습니다. 정의기억연대를 상대로 한 송사에서 미디어워치처럼 확실히 승소한 사례도 없습니다.
공 : 윤미향 의원이 개입된 것으로 의심되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의혹들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지금은 정의기억연대가 동네북 신세가 됐습니다.
황 : 저희가 윤미향 의원 측과 한창 격돌할 당시에는 정의기억연대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과 금기로 통했습니다.
공 : 미디어워치가 세간에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생각됩니다.
황 : 제가 미디어워치의 대표로 정식으로 취임한 때가 2016년 9월이었습니다.
공 : 공교롭게도 바로 태풍전야 시점이네요.
황 : 대표 명함 파기 무섭게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이 터졌습니다. 제 인생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어요. 그때는 진짜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암담하고 절망적인 하락장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 : 한 줄기 빛 같은 일이?
황 : 변 고문이 검찰과 JTBC가 공모한 태블릿 PC 조작 행위를 딱 잡아냈습니다.
공 : 그 사건이 변희재와 황의원 두 사람이 겪어온 모진 수난사의 본격적 출발점입니다.
황 : 변희재 고문은 2018년 5월 법원에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돼 구속됐습니다. 저는 변 고문의 옥바라지를 하며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저까지 같은 해 12월에 법정구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 : 구치소에서는 언제 풀려나셨나요?
황 : 다음해인 5월에 보석으로 나와 지금까지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잠시 사무실 천장을 응시했다가) 여성분과의 맞선 자리에서 하면 바람맞을 이야기들만 하게 됐네요.
공 : 인생지사 새옹지마입니다. 변 고문과 황 대표 두 분에게도 좋은 날들이 곧 올 겁니다.
황 : 저도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언론학자 강준만에게 미학과 복학생 변희재의 진가를 소개하다
공 : 고용이 보장된 지하철 기관사로 안정된 중산층 생활을 누렸을 황의원 대표의 인생의 물줄기를 확 바꾼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입니다. 강준만 교수의 어느 책에서 어떤 충격과 깨달음을 받았는지 기억하실 수 있나요?
황 :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제 전직이었던 지하철 기관사에 대해 몇 마디만 더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운전기전과’를 졸업했습니다. 지하철 기관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학과입니다. 지하철은 각 열차가 전기동력으로 움직이는 2종 전기동차 차량으로 분류되고, 저는 해당 차량을 운행할 수 있는 자격증을 땄습니다.
공 : 그럼 1종은 뭔가요?
황 : 열차들 중에 가장 앞에 있는 전기기관차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차량입니다. 1종이 있으면 2종까지 운행할 수가 있는 자동차 운전면허증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공 : 자동차와 다르게 기차는 동력원의 차이가 기준이 되네요. 그럼 기관사 2종 자격증이 있으면 KTX 열차도 운전할 수 있습니까?
황 : 그건 아닙니다. 고속전철 견인차의 운전석에 앉으려면 몇 년간의 전환교육을 추가로 받아야 합니다.
공 : 그러면 부산지하철 기관사가 서울지하철로 옮겨오는 게 가능한가요?
황 : 기술적으로는 별다른 장벽이 없습니다. 지하철 기관차는 전부 전기로 구동됩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 지하철공사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일했던 부산지하철은 근무여건이 굉장히 좋은 곳이었습니다. 대구지하철과 광주지하철에서 저희 회사로 이직을 해온 기관사 분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공 :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관사의 세계인데 아쉽지만 공식 인터뷰에서는 여기까지만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끝나고 저녁식사 같이하며 계속 들려주세요.
황 : 예, 그러겠습니다. (잠시 숨을 돌린 후에) 저는 20대 초반 시절에 강준만 교수가 내놓은 「김대중 죽이기」, 「김영삼 이데올로기」, 「전라도 죽이기」라는 세 권의 책을 잇달아 탐독하며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설정했습니다. 책에서 개진된 논리와 주장들 가운데 그른 말이 한 개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책에 실린 내용 전체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공 : 황 대표께서는 대구가 고향이고, 성장지는 부산입니다. 강준만 교수의 핵심적 주제의식은 “호남차별에 토대를 둔 영남패권주의” 문제로 압축되는데, 여기에 쉽사리 공감할 지역적 환경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황 : 제가 그 무렵에는 진보좌파 성향이 뚜렷했습니다. 더군다나 강준만 교수가 주도적으로 발행하는 「인물과 사상」 시리즈의 독자층이 부산 지역에 비교적 두텁게 형성돼 있었습니다.
공 : 아 맞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각종 선거에 연거푸 출마해 낙선을 거듭한 일의 영향으로 부산에 노무현 신드롬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그 노무현 신드롬의 실질적 대부가 다름 아닌 강준만 교수였습니다.
황 : 그게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부산에서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 : 저에게는 그 시절이 노사모가 인사모(인물과사상 독자 모임)이고 인사모가 노사모이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황금시대로 추억됩니다. 갑자기 아련해지네요.
황 : 강준만 교수의 책은 반박하려야 반박할 수 없는 진리들로 가득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맞는 말 대잔치였습니다. 때마침 그즈음은 칙칙하고 음산한 세기말 분위기가 곳곳에서 횡행하던 때였습니다.
공 : 지적 허무주의가 마구 기승을 부렸죠.
황 : 세기말 분위기와 맹렬하게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겹치면서 진실도 없고, 정의도 없다는 식의 상대주의가 도처에 만연했습니다. 사방이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것 같은 상황에서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으면 머리가 순식간에 시원하게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강준만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유일무이한 모더니스트로 저에게는 각인됐습니다. 그러니 너무 멋있게 보일 수밖에요. 강준만 교수와 그의 동료 저자들이 제겐 홍콩 느와르 영화의 대명사 「영웅본색」의 주인공들처럼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공 : 영웅본색까지!
황 : 제 시각에서는 솔직히 그랬습니다. 게다가 강준만 교수가 키도 크고 얼굴도 사나이답게 씩씩하게 생겼고요.
강준만이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전인 청소년 시절에 주먹깨나 썼었다는 풍설은 그의 애독자들 사이에서 현재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돼오고 있다.
공 : 황의원에게 강준만은 총 대신 펜을 든 주윤발이었네요. 영화 속 주윤발이 쌍권총으로 홍콩 암흑가를 제압했다면, 현실의 강준만은 글발로 한국의 지식사회를 평정했습니다.
황 : 진보적 월간지 「말」은 글의 수위도 높을 뿐더러 논조도 대단히 과격했습니다. 그런데 천하의 말지조차 강준만 곁에 서면 얌전한 요조숙녀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공 :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옆에선 말지가 졸지에 「좋은생각」이 된 형국입니다. 강준만이 주윤발이었다면, 강준만의 수제자로 통칭되던 변희재는 황의원에게 장국영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요?
황 : 장국영이기도 했고, 유덕화이기도 했고, 적룡이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멋졌습니다. 강준만의 또 다른 저서로 「사람들은 왜 분노를 잃었을까」란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2000년 4월에 출간된 책입니다. 제목부터가 확 끌렸습니다. 이 책에서 강 교수는 대한민국 엘리트층의 위선과 이중성을, 언행의 불일치와 앎과 삶의 비일관성을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공 : 좌우를 망라한 대한민국 기득권 계급의 내로남불에 대한 최초의 통렬한 고발이었던 셈이네요.
황 : 강준만은 이미 그때부터 공적인 인물을 검증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작업에서 진실성(Integrity)의 잣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중대하고 운명적인 소명의식이 발동했습니다.
공 : 어떤 소명의식인가요?
황 : 강준만에게 변희재의 진가를 어서빨리 알려야겠다는 의무감이었습니다. 제가 당시 PC 통신 하이텔의 가입자였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복학생 변희재의 시사논평과 스타비평, 그리고 강준만에 관해 PC 통신에 올린 글들을 전부 갈무리한 다음 이걸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해 강준만 교수에게 우편으로 부쳤습니다. 제가 강 교수에게 손으로 쓴 편지들 또한 우편물 목록에 물론 포함돼 있었습니다.
공 :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보다 젊었을 적의 강준만은 자신에게 도착한 모든 편지와 인쇄물들을 일일이 직접 꼼꼼히 읽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 :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강준만 교수가 강연 때문에 부산을 방문하면 저는 그의 강연을 다 듣고, 전주로 가는 버스 배웅까지 혼자 다 도맡았을 정도였습니다.
공 : 20대 청년 황의원에게 강준만은 완전 이이돌이었네요.
황 : 변희재 고문이 저자로서 세상에 첫선을 보인 책이 「도서출판 인물과사상」에서 나온 「스타비평」 시리즈였습니다. 제가 강준만에게 소개한 청년 논객이 강준만의 출판사를 통해 데뷔하는 감격적 순간이었습니다.
공 : 저도 「스타비평」 1권과 2권을 다 읽은 기업이 납니다. 변 고문이 목소리 잃은 카나리아에 비유했던 연기자 겸 광고모델 김지호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지호 씨가 한국나이로 이제 50이니 세월 참 빠릅니다.
황 : 「스타비평」은 변희재 고문이 하이텔에 썼던 글들이 초안 역할을 한 책입니다. 저는 PC 통신에 올라왔던 변 고문의 대중문화 비평들을 일일이 갈무리해 강준만 교수에게 소포로 발송했습니다.
공 : 황의원 대표와 변희재 고문 두 사람이 오프라인에서 최초로 만났던 때는 언제쯤인가요?
황 : 1998년도였습니다. 서울역 앞에서 개인적으로 한번 만났던 것 같고, 이후 군복무 시절은 물론 전역 이후에도 강준만 교수의 팬클럽 모임 등에서 계속해서 여러 번 만났습니다. 벌써 25년 전이네요.
공 : 그야말로 세기를 넘은 인연입니다.
황 : 변 고문과 저는 코드가 잘 맞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빈번히 어울렸습니다. 술도 함께 자주 마셨어요. 저희 모두 신체적으로 한창 팔팔했을 시기이니 두주불사였습니다. 변희재 고문으로부터는 제가 갖지 못한 일종의 포스 같은 게 발산됐습니다. 강준만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었다면, 변희재는 상대성 이론을 창안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공 :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강준만이 소크라테스고 변희재는 플라톤. 그렇다면 황의원은 아리스토텔레스?
황 : 저까지 덤으로 끼워 넣으시면 미디어워치 독자들로부터 제가 엄청 욕먹습니다. (웃음) (③회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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