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되는 꿈을 오래전에 접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에게 이제는 인기 없는 주제가 된 통일은 운명적으로 짊어져야만 할 책무일 터이다. 이미지는 정동영 의원이 이재명 정부의 통일부 장관 하마평에 올랐다는 소식을 보도한 MBN 뉴스 화면
“장관님께서는 김정일을 만난 유일한 대선주자이신데, 그 경륜이 그대로 묻힐지도 몰라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때였다.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가 대세론을 앞세워 대통령 후보로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민주당에서는 친노진영의 총력 지원을 등에 업은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경선 압승이 유력시됐다. 장외에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안철수 현상’에 힘입어 2012년 대선 정국의 다크호스로 무섭게 떠올랐다. 2007년의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완패했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치 컨설턴트를 자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컨설턴트의 생명이라고 할 영업력 없기로는 남부럽지 않았던 필자가 어렵지 않게 정동영과 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즈음 정치인 정동영의 몸값이 하한가를 친 덕분이었다. MBC 문화방송의 간판 앵커 출신으로 1996년 실시된 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정치권에 등장했던 정동영으로서는 세월의 무상함과 염량세태의 쓴맛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을 시기였다.
다른 사람의 배석 없이 독대 형식으로 그와 이런저런 주제로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억된다. 정동영은 내가 던지는 질문들에 막힘없이 술술 대답을 이어갔고, 대화의 내용에는 남북관계의 현황과 전망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나는 당시는 아직 생존해 있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한반도 문제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해본 우리나라 유력 현역 정치인은 실질적으로 정동영이 유일함을 지적하며, 그가 남북관계의 발전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국내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사실이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 순간 정동영은 달변으로 유명했던 평소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사무실 천장을 망연한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어색한 침묵이 얼마간 흐른 후 그는 자신이 통일부 장관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일을 회담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해줬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회한과 슬픔이 교차하는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정동영의 모습만은 필자의 뇌리에 여태껏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의 강렬한 인상 탓이었을까? 나는 이재명 정부의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정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이름이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소식에 마치 내가 억대 연봉울 챙겨주는 내로라하는 공기업 감사 자리에 임명된 것만큼이나 기쁘고 반가웠다. 윤석열 정권 3년 동안 악화할 대로 악화한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방향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정동영이 마침내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에서였다.
정동영 의원이 첫 번째로 통일부 장관을 지내던 시절과 비교해 많은 것들이 변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는 김정일로부터 그의 3남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 교체됐다. 김정은은 선대 통치자들과는 달리 이른바 핵무력을 공공연히 증강·과시해왔다.
한국 사회의 풍경 또한 크게 바뀌었다. 남북한 관계의 성격과 본질을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파악·규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북한의 김정은-김여정 남매와 한국의 대다수 2030 청년세대의 코드가 일치하고 있다. 하필이면 한창 피 끓는 나이의 청년층이 통일에 부정적인 반(反)통일 세대의 주력으로 우뚝 서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의 비핵화 또는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목적으로 6자 회담의 틀 안에서 공동보조를 취했던 미국과 중국은 흔히 ‘미중 전략경쟁’으로 불리는 새로운 냉전질서를 형성했다. 정동영이 정부 통일정책의 공식 사령탑으로 휴전선을 부지런히 넘나들던 시기와 견주어 한반도 내외의 정세와 환경이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되는 까닭들이다.
그럼에도 정동영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분단체제의 평화적 극복이라는 임무를 다시금 맡아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정동영은 한반도의 확고한 평화 정칙과 분단의 최종적 해소를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로 여기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참다운 의사가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아픈 사람이면 무조건 치료해주듯이, 한국의 통일부 장관은 나라 안팎에 도사린 난관들을 무릅쓰며 남북한의 공존을 모색하고 주변국들의 협조를 견인해야만 한다. 윤석열 정권의 통일부는 병원에 빗대면 환자를 골라 받는 병원이었다. 윤 정권의 통일부 장관은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들을 치우기는커녕 자기 스스로가 장애물이 되려 작정한 듯한 인간이었다.
남북한 사이에 작금에 이란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같은 파국적 무력충돌이 발생한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역시 지도에서 사라질 게 뻔하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대략 2천 킬로미터 정도에 달하는 거리로 떨어져 있다. 반면, 한국과 북한 사이에는 고작 4킬로미터에 불과한 비무장지대가 존재할 뿐이다. 중동 지역 유일의 핵무장 국가 이스라엘과 9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거인 이란이 남북한처럼 지리적으로 맞붙어 있었다면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모두 현재와 같은 무모하고 호전적인 강경파는 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서 통일은 내각제나 증세만큼이나 인기 없는 목표가 돼버렸다. 통일은 거론하는 즉시 구닥다리 취급받기 딱 알맞은 소재로 전락했다. 그러나 통일은 인기 없어도 반드시 지향해야 할 목표이고, 구닥다리 취급을 받아도 끊임없이 대중 앞에 제시해야만 할 화두이다. 왜냐? 개 꼬리 삼년 묵어도 황모가 되지 않는 것처럼, 70년 넘게 계속됐다고 하여 분단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통일이라는 정상적 상태를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동영은 오래전에 대통령 꿈을 접었다. 그런데 대통령 꿈을 접었기에 그는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긴 안목으로 정책을 추진·집행할 수가 있다.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을 한 차례 더 역임한다고 하여 작금의 최악의 남북관계가 단기간에 개선될 수는 없으리라. 한반도가 단숨에 평화와 공존의 땅으로 일변하지도 않으리라.
다만, 경력직 통일부 장관 정동영은 평화가 물과 공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 요소임을, 통일이 집값을 안정시키고 인공지능(AI)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일 못잖게 포기할 수 없는 범국가적 차원의 과제임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깨우쳐줄 순 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정동영이 이제까지 그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헌신이자 라스트 댄스(Last Dance)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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