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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태의 「초소통사회 대한민국 키워드」를 입력하며 - 서프라이즈에서 드루킹까지, 디지털 브로커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공희준 메시지 크리에이터

  • 기사등록 2018-12-28 16: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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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태의 족집게 예언


「초소통사회 대한민국 키워드」에는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사회의 미래를 만들어갈 SNS 시대의 구체적인 열쇳말들이 담겨 있다. (김헌태 지음 / 21세기북스 펴냄)기술의 혁신과 그에 수반된 산업의 발전은 수많은 신종 직업들을 양산해왔다. 브로커(Broker)라는 직업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만약에 세계 최초의 브로커가 있었다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알려준 뱀이었을 듯싶다.


뱀은 교활함과 음흉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세계 최초의 브로커가 뱀일 수도 있다는 점은 우리말로 중개인 혹은 거간꾼으로 번역되기 마련인 브로커가 왜 그리 징그럽고 부정적인 어감을 주는지를 태초부터 명징하게 설명해온 셈이다.


김헌태는 대중정치 연구자이자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정치 컨설턴트이다. 그는 크게는 이회창 대세론이, 작게는 이인제 대세론이 맹위를 떨치던 2002년 초에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차기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예감케 해주는 미묘한 여론지형의 변화를 포착해냄으로써 역대급 정치태풍이었던 ‘노풍’의 진로와 위력을 족집게도사같이 기막히게 예측한 바가 있다.


‘노무현 돌풍’의 준말이기도 한 노풍은 이인제 대세론과 이회창 대세론를 차례로 날려버리고, 마지막에는 새천년민주당 일각에서 모락모락 피어났던 정몽준 대망론마저도 허망한 백일몽으로 만들며 진정한 의미의 대중정치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혔다.


노풍에서 안철수 현상까지


노풍은 진로와 위력의 대략적 예보가 가능했다. 노풍이 근본 있는 태풍이었던 덕분이다. 허나 안철수 현상이 일어날 즈음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의 예보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근본 있는 태풍의 시대는 끝나고, 근본 없는 태풍들의 시대가 도래했던 탓이다.


김헌태의 신간 「초소통사회 대한민국 키워드」는 좁은 범위로는 여의도 정치권을, 넓은 맥락으로는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강타하는 정치사회적 태풍들의 진로를 예측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진 근본적 원인을 초소통혁명 또는 디지털 혁명에서 찾고 있다.


김헌태의 진단을 인용하자면 초소통혁명 또는 디지털 소통혁명은 디지털과 모바일, 그리고 SNS가 결합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변동을 가리킨다. 소통이 활성화되어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 기반 위에서 대중이 조직되는 현상은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스마트폰이 이와 같은 과정을 극단적으로 촉진‧확대‧증폭시켜왔다는 데 있다. 저자가 초소통사회의 부산물로 초공감과 초조직을 제시해놓은 이유이리라.


변희재가 제기하고 드루킹이 검증하다


정답은 오답을 가려내는 단계에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껏 바뀌지 않아온 것들을 간추려내고 정리함으로써 변화의 향방과 내용을 비슷하게나마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년 넘게 변하지 않아온 세태들 가운데 하나가 디지털 브로커들의 존재다. 디지털 브로커들의 계보를 추적하려면 지금은 아득한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PC통신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최초의 디지털 거간꾼은 김유식 현 디시인사이드 대표와, 딴지일보 운영자 역할은 사실상 명예직으로 방기한 상태에서 방송 진행자로서의 활동에 전념하다시피 하고 있는 김어준 총수가 있다. 제일로 유명한, 동시에 가장 심각한 사회적 폐해를 가져온 디지털 브로커는 당연히 드루킹 김동원 씨이다. 드루킹은 네이버의 인기검색어와 댓글을 지배하는 자가 민심과 여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전에서 증명했다.


“포털사이트를 지배하는 자가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는 이론을 선도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현재는 차가운 구치소에서 영어의 신세가 돼있는 변희재 전 미디어워치 대표였다. 극우 논객의 가설을 열혈 친문 네티즌 집단이 실전에서 효과적으로 응용한 형국이었다.


「초소통사회 대한민국 키워드」는 포털을 지배하는 자가 국가를 지배하는 전대미문의 ‘포털크라시(Portalcracy)’ 치하의 대한민국을 여론조사 전문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담아낸 노작이다. 이 책에 내 이름도 이물질처럼 들어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책이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구입했다. 그런데 내가 등장하는 부분을 막상 읽고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김헌태가 만들어낸 신조어일 ‘디지털 브로커’라는 단어 탓이었다.


디지털 브로커는 특정 정치인이나 특정 정치 세력의 지지층을 조직하거나 다지는 역할을 수행하는 누리꾼을 지칭한다. 한데 김헌태는 이들을 조직가(Organizer)라는 중립적 단어 대신에 브로커라는 매우 음침하고 음모론적인 용어로 호명하였다. 그는 심지어 스핀 닥터(Spin Doctor)란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정착된 용어조차 배제하였다.


왜냐? 이들 디지털 브로커들이 정치적 갈등을 몹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극대화시켜 출세와 성공을 노리는 이유에서였다. 디지털 브로커들이 염두에 둔 출세와 성공은 정당의 공천, 방송계 진출, 공공기관 임직원 자리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때로는 논객이라는 허울 아래 인지도를 높임으로써 평범한 일반 네티즌들은 누리가 어려운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획득한 유명세와 사회적 영향력은 최종적으로는 돈 또는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한 요긴한 발판이자 기반으로 활용된다. 그 여파일까? 최근에는 여러 명의 전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한 기존의 제도권 정치인들까지 공공연하게 디지털 브로커 노릇을 태연히 해대고 있다.


포털크라시의 스핀닥터들


이름쟁이 최기수가 국민일보 기자 서영석의 이름을 빌려 기획‧제작‧관리하고 공희준이 편집 및 운영한 정치웹진 서프라이즈에는 ‘댓글공격’, ‘양념치기’, ‘상대방 악마 만들기’, ‘좋아요 몰아주기’ 등 이후 한국사회 인터넷 문화를 황폐화시킨 모든 고질적 병폐의 소스코드가 내장돼 있었다. 사진은 서프라이즈 초기 모습

PC통신 시절의 독립된 디지털 브로커와 포털크라시 시대의 조직된 디지털 브로커들 사이에 우리나라 최초, 어쩌면 전 세계 최초의 인터넷 정치 플랫폼이었던 서프라이즈가 가로놓여 있다. 저자인 김헌태는 서영석 전 국민일보 정치부장을 서프라이즈의 대표로 책에서 명기했으나, 서프라이즈는 웹마스터였던 이름쟁이 최기수 씨와 초대 편집장이었던 공희준 두 사람에게 사이트의 실질적 제어권이 있었다. 이름쟁이와 내가 서프라이즈를 떠난 후에 편집장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은 서영석 기자의 관리감독을 충실히 따르는 실무자급 정도의 위상과 기능에 머물렀을 뿐이다.


김헌태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가 한국의 대표적 여론조사 전문가인 까닭에 김헌태를 허구한 날 엑셀 프로그램의 그래프 화면만 뚫어져랴 쳐다보는 차갑고 무미건조한 인간으로 오인할 수도 있겠지만. 김헌태가 실생활에서 즐기는 콘텐츠는 시와 소설 등의 문학작품들이다. 그의 책과 문장이 언론정보학 전공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유려한 미문을 자랑해온 배경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김헌태는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과 일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와 정반대로 나를 위시한 서프라이즈의 ‘오리지널’ 창립 구성원들은 갈등을 확대재생산하는 걸 시대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역사적 소명이자 과업으로 철석같이 확신하는 이들이었다.


김헌태는 초소통사회가 초공감사회로 진화하기를 바라며 책을 집필한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현실은 김헌태의 희망과는 다르게 초공감사회가 아닌 초반감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일베충의 발호와 메갈리안의 창궐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살기가 등등한 초반감사회가 불러온 전형적 병증들이다.


초소통사회가 그릇되게 변질된 초반감사회는 판단과 생각을 위임하는 사회다. 우리는 권력을 위임하는 데는 반대하면서도 정작 판단과 생각을 위임하는 데는 익숙함을 넘어 아예 무감각해져버린 ‘분노한 대중의 사회’의 모습을 요즘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나라를 말아먹어도 박근혜를 지지하겠다는 대구 서문시장의 60대 여성과, 잘생겼기 때문에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에게 투표했다는 30대 맘카페 회원은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이 아니다. 생각과 판단을 위임한 것이다.


노빠와 문빠는 어떻게 다른가


드루킹은 네이버를 장악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가설의 타당성을 네이버의 묵인 아래 적나라하게 실증했다. 네이버에 올라오는 특정 기사에 대한 좌표 찍기는 드루킹과 그 조직원들의 사법처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드루킹 페이스북 계정 갈무리

그들은 왜 권력이 아닌 생각과 판단을 위임하게 되었을까? 외면적으로는 동일한 정치팬덤으로 여겨질지언정 노빠와 문빠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노빠는 나름 이념과 노선을 중심으로 뭉친 사람들들이었다. 따라서 독자적 생각과 판단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빠는 스펙과 취향이 확고한 결속의 토대로 작용한다. 생각이 달라도, 아니 생각이 없어도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표준적 노빠가 가난한 서민층 남성으로 묘사되었다면, 표준적 문빠가 부유한 강남 여성으로 상정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결과 노빠의 시대에는 머리를 모으는 일이 중요했다면, 문빠의 시대에는 머릿수를 모으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김헌태는 초소통사회가 엘리트와 전문가의 전성기에 조종을 울렸다고 분석했다. 그람시는 위기를 옛것은 사라졌으되 새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황으로 규정했다. 초소통사회는 위기의 시대다. 엘리트와 전문가는 밀려났지만, 엘리트와 전문가들이 남긴 공백을 채워줄 제대로 된 이른바 집단지성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리더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


김헌태는 머릿수만 필요한 정치인과, 생각과 판단마저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무책임하게 위임하는 맹목적 극렬 지지자들의 중간지대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며 권력과 이권을 도모해온 디지털 브로커들에게 아주 단호한 어조로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결국에 맞닥뜨릴 건 파국의 순간이라고 김헌태는 준열하게 경고한다.


초소통사회를 초반감사회가 아니라 초공감사회로 이끌려면 너나 할 것 없이 과감한 변화와 진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변화라는 게 일견 어려운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또 쉽기도 하다. 스스로의 과오와 불의함을 흔쾌히 인정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서프라이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웹사이트였다. 서프라이즈가 없었으면 변희재의 개인적 불행도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개 무명 독자에 불과했던 뽀띠가 나중에 드루킹이라는 괴물로 변신하는 사태도 없었을 것이다. 정치인에게 권력이 아닌 생각과 판단을 위임하는 불순물 같고 미꾸라지 같은 각약각색의 ‘빠’들도 단체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빠들의 양념질을 시주받으며 적폐청산에 부실시공된 불법사찰에서 내로남불을 읊어대는 586 선무당들도 출현하지 않았을 터이다.


브로커는 남의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나의 판단을 검증받는 인간이다. 초소통사회에서 우리는 브로커도, 팔로워도 되지 말아야 한다. 리더가 되어야 한다. 나의 미래를 결정하고 운명을 인도해줄 지도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나를 책임감 있게 이끄는 수많은 나들이 모일 때에야 비로소 초소통사회는 초공감사회로의 변증법적 지양을 훌륭하게 이룰 수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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